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오나귀')은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1인 3역이나 다름 없는 캐릭터를 완벽히 연기한 박보영의 사랑스러움과 현실적인 연기로 중심을 잡은 조정석의 연기가 빛났고, 로맨틱 코미디부터 스릴러물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스토리도 훌륭했다. 완성도가 높은 드라마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장점이 다양하게 드러난 이 드라마에서 재미를 담당한 인물들은 주방 4인이었다. 특히 수셰프 허민수를 맡은 강기영의 연기는 작품을 빈틈없고 풍성하게 만드는데 한 몫했다.
극중 허민수는 처음엔 분명 얄밉기만 했던 존재였는데, 언제부턴가 인간미가 느껴지고 정감이 갔다. 미운 짓을 골라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정감 가는 캐릭터였다. 주방 사람들과의 애드립은 여느 작품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신선했고 톡톡 튀었다. 강기영은 허민수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부각시켰고, 감초 이상의 존재감을 뽐냈다. 어디서 이런 매력적인 재목이 나타난 걸까.
강기영. 사진/디오르골엔터테인먼트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강기영을 최근 서울 역삼동 소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작품에서 워낙 까불거리는 모습을 보였던지라 중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첫 만남 순간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조증에 가까운 허민수를 상상하다 굉장히 현실적인 강기영을 만난 것에 대해 당황하는 기색을 비치자 그는 "제가 접대용 목소리가 따로 있습니다"라며 재치 있는 멘트를 던졌다. 극중에서 허민수가 쉼 없이 웃기려고 했던 것처럼 강기영 역시 그 자체가 웃음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1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즐거운 인터뷰가 됐다. 유쾌하고 즐거운 강기영이 어떻게 배우가 됐는지 그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를 들어봤다.
◇무너진 아이스하키 선수의 꿈
강기영은 중학교 때부터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려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을 했다.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그만두게 됐다.
"지금은 어깨가 벌어지고 키도 더 컸는데, 운동을 할 땐 정말 마르고 왜소했어요. 키도 작았고요. 거친 운동을 하기엔 벅찬 체격이었어요. 하다 하다가 지치더라고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강릉 합숙을 가게 됐는데, 그냥 뛰쳐나왔어요. 그렇게 먹는데도 살도 안찌고, 체력이 부족한 것 같고요. 불안했었어요. 그래서 뛰쳐나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의지가 약했다라고 하기보다는 용감했던 결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지 않는 용기랄까요. 철없는 짓이기도 한데, 잘 그만둔 거 같아요."
강기영. 사진/디오르골엔터테인먼트
◇방황하던 시기
아이스하키를 그만두면서 학교도 같이 그만뒀다.이후 미국으로 넘어가 유학생활을 했다. 원체 흥이 넘치다보니 미국에서 영어보다는 문화를 배워왔다.
그리고 다시 귀국했다. 친한 친구 두 명은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는데, 강기영은 귀국 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 몰랐던 방황하던 시기다.
"미술에도 관심이 있어서 그쪽으로 진학을 해볼까도 생각했고, 하키를 다시 해볼까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시도한 건 없었죠. 사실 뭘 해야될지 몰랐던 거죠. 친구들은 좋은 대학가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전 아무것도 안 했죠. 어느 날은 아버지가 베개로 때리더라고요. 하하."
◇우연히 접하게 된 연극
2003년이었다. 귀국을 하고 방황하던 시기 어머니의 친구 딸이 공연하는 연극을 보러가게 됐다. 그 연극 관람이 강기영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연극을 보고서는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입시 때는 정말 연기를 열심히 했죠. 사실 입시를 준비하기 좀 부족한 시간이었는데, 워낙 간절하니까 최선을 다해서 연기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아마 그 때처럼 연기를 했으면 전 벌써 성공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수원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행운이 따랐다고 말한다. 그토록 갈구하던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뒤 그는 학교생활에 심취하게 된다. 성격이 워낙 좋은 덕에 친구들과 노는 게 정말 즐거웠다고 하는 그다.
"연기를 했어야 했는데, 술 먹고 놀았죠. 과 사람들이 끼도 많고 재밌으니까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집중했어요. 정말 후회없이 놀았어요. 학교생활이 정말 재밌었죠."
◇본격적인 연기의 시작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했으니, 군대도 늦게 다녀왔다. 제대를 한 20대 중후반, 슬슬 불안함을 느낀 강기영은 본격적으로 연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과에서 만든 공연에 참여한다.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이 아니었는데, 뛰어난 순발력으로 배역의 비중을 높였다. 관객들에게 재밌었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두 번째 공연에서도 작은 배역을 비중 있게 키웠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한다.
"당시에 '난 대학에서 썩힐 실력은 아니구나'라는 오만방자함이 있었어요. 하하. 그래서 사회로 나왔죠. 그리고 호되게 당했어요. 세상의 높은 벽과 냉정함에. 또 그 때 집의 가세가 좀 기울었었어요. 그렇게 못 사는 집은 아니었는데, 그 때 좀 경제적으로 힘들어졌죠. 그래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집에 큰 소리 치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어요. 오디션을 보는데도 캐스팅이 안 됐고요. 그러다 우연히 광고를 접하게 됐어요."
유재석(오른쪽)과 광고를 찍은 경험이 있는 강기영. 사진/광고화면 캡쳐
◇광고계의 유재석
강기영은 정말 수 없이 많은 광고에 출연했다. 유재석의 옆에서 등장하기도 하고, 광고를 잘 찍기로 유명한 제약회사의 제품 광고에도 나온다. 나름 광고계의 유재석이었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광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기획사 없이 혼자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정말 많이 촬영하지 않았나 싶어요. 등용문이라 불리는 박카스 광고에도 나갔어요. 하다하다 되는게 없어서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덜컥 박카스 광고에 붙었어요. 그 때 '이광수처럼 되는 구나'라고 기대도 많이 했죠. 근데 내용에 문제가 있어서 광고가 2주 만에 내려갔어요. 상심이 크긴 했는데, 그 때부터 좀 알려져서 광고를 정말 많이 찍었죠. 그러면서 연극 오디션에 캐스팅도 되고요. 광고로 돈 벌다가 작품 하나 찍고, 다시 광고로 돈 벌고 작품 하나 찍고 그렇게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갔어요."
강기영은 아이스하키 유니폼과 장비를 입고 '고교처세왕' 미팅에 참여했다. 사진/디오르골 엔터테인먼트
◇'고교처세왕'을 통한 드라마 첫 출연
연극 무대에서 연기력을 키우던 강기영은 친분이 두터웠던 감독이 차린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소속 배우가 된다. 그게 지금의 디오르골 엔터테인먼트다. 그리고 우연찮게 tvN 드라마 '고교처세왕' 오디션을 보게 된다. '오나귀'는 '고교처세왕' 제작진이 만든 작품이다.
"32살이었는데 고등학생 역할에 미팅을 하게 된 거죠. 제가 조금 어려보이는 인상이 있긴 하지만 '오버'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도 정말 캐스팅이 되고 싶었어요. 그 작품이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이야기잖아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아이스하키 동호회에서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어서 유니폼하고 장비가 있었어요. 그래서 미팅 하러 갈 때 아이스하키 옷과 장비를 착용하고 갔죠. 그것 때문에 감독님께 점수를 딴 거 같아요."
◇'리셋'·'빛나거나 미치거나'를 거친 뒤 '오나귀' 출연
'고교처세왕' 이후 얼굴을 알린 강기영은 OCN 드라마 '리셋'과 MBC '빛나거나 미치거나'에 출연하게 된다. 연기적인 면에서 꾸준히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오나귀'에 오디션 없이 출연한다.
"작가님이 수셰프는 저를 염두하고 쓰셨다고 하더라고요. 미팅 없이 작품에 들어가게 된 첫 드라마가 '오나귀'죠. 저를 생각하시고 쓰셔서 그런지 캐릭터 자체에 이질감이 전혀 없고, 신도 정말 많아서 놀랐어요. 엄청 기뻤죠. 하하."
최지웅-김슬기-곽시양-강기영-최민철(왼쪽부터). 강기영은 주방 식구 연기자들 덕분에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고 밝혔다. 사진/tvN
◇입체적인 허민수를 만들다
허민수의 연기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후배들을 괴롭히는 수셰프, 강선우(조정석 분) 셰프와 다툰 뒤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갔다가 복귀, 복귀 후 인간미 넘치는 수셰프까지 허민수는 작품 내에서 계속 변화했다. 처음엔 분명 얄밉기만 한 그가 인간미를 보여주고 정감이 가는 인물로 바뀌었다. 중간 중간 최지웅 역의 오의식과 보여준 빛나는 애드립 연기까지 '오나귀'에서 강기영은 감초 이상의 존재감이었다. 그는 허민수란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려 했을까.
"얄밉기만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1차원적으로 연기를 하면 결국 얄미운 것만 남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인간미를 좀 더 보여주려고 했죠. 그렇게 된 건 다분히 주방 식구들 덕이었어요. 실제로 주방 식구들과 술도 많이 먹고 친해졌거든요. 제일 많이 도와준 건 의식이였어요. 제가 애드립을 짜가서 연기를 하면 의식이가 다 받아줬어요. 그리고 감독님도 저희 대사가 끝날 때까지 컷을 안 해요. 그러면 저희는 어떤 거라도 만들어내거든요. 저희가 친해지다 보니까 자연스러운 모습이 연기에서 녹아나고, 그런 점이 시청자들에게 조금은 전달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의식이가 정말 고마운 건 저를 빛내주는 거 이상으로 욕심을 내지 않았어요. 저였다면 분명 욕심을 냈을 것 같은데, 의식이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맙죠."
강기영은 목소리도 특이하게 냈다. 현실에서 보기 쉽지 않은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선보였다.
"원래도 살짝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그걸 극대화 했죠. 너무 얄밉기만 하면 안 되니까요."
강기영이 '오나귀'에서 펜싱 연기를 펼치고 있다. 사진/tN
◇톡톡 튀는 애드립
극중에서 주방 4인의 애드립은 특히 뛰어났다. 허민수가 자신의 태몽은 학이라고 하면서 학을 따라한 신은 팬들에게 아직도 회자되는 장면이다. 당시 대본에는 자신의 태몽이 학이라고 말하는 것만 있었다. 기지를 발휘한 강기영은 '까악 까악' 하면서 학을 연기했다. 그러자 오의식은 "학이 나타났다. 학아 모이 먹어"라며 모이를 주는 모션을 취했고, 강기영은 이를 받아먹는 연기를 펼쳤다. 분명히 애드립이었는데, 굉장히 자연스러웠고 웃겼다.
"의식이는 말도 안 되는 걸 다 받아줬어요. 기타치고 있을 때 제가 뺨을 때리면 자연스럽게 리액션을 해주고요. 애드립이 정말 많았는데, 순발력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저도 한 순발력 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식이는 더 뛰어나요. 고급스럽게 애드립을 한다고 해야되나. (조)정석이 형도 애드립에 일가견이 있는데, 캐릭터가 진중하다보니까 직접 하지는 않았어요.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였는지 저에게 이것저것 많이 알려줬어요. 아이디어를 서로 정말 많이 공유했어요. 주방식구들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강기영에게 큰 감동을 준 유재원 PD. 사진/tvN
◇장난기 넘치는 강기영의 두 번의 몰래카메라
평소에도 장난기가 굉장히 심하다고 한다. 재밌고 유쾌한 걸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장난을 많이 친다고 한다. '오나귀' 촬영기간 동안 그 장난기를 숨기지 못하고 두 번의 몰래카메라를 했다고 한다. 한 명은 유재원 PD, 또 다른 한 명은 박보영이었다고 한다.
"'오나귀' 쫑파티 때였어요. CJ 드라마국장님도 오셨었어요. 정석이형이랑 의식이랑 촬영감독님하고만 몰래카메라를 짰어요. 제가 술에 취한 척 연기를 하면 촬영감독님이 저를 때리고 제가 깽판 치는 스토리였어요. 안주 던지고 욕하고 막 그러다가 마지막에 '콩그레이추레이션'을 하는 거였죠. 원래 감독님이 천사 같은 분이시거든요. 그 치열한 촬영현장에서도 화 한 번 내신 적이 없어요. 근데 그 때 제 몰래카메라에 살기를 보였다고 하시더라고요."
몰래카메라가 완벽히 끝난 뒤 강기영은 유재원 감독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감독님이 저 뼈를 부러뜨리려고 했었데요. 제가 실수를 해서 욕을 먹으면 그 욕을 듣는 감독님이 너무 싫었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 뼈를 부러뜨리고 자신이 욕을 먹으려고 하셨대요. 그 말을 듣고 정말 울컥했죠.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죠."
앞서서는 박보영을 속인 적이 있다. 유 감독을 속였을 때와 같은 패턴이었다. 술 취한 척 하다가 조정석과 싸우고 마지막엔 닭싸움을 하는 거였다. 박보영 역시 완벽히 속아 넘어갔다고 한다.
"보영이가 그러더라고요. 이 '오빠는 절대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요. 하하. 나중에는 정석이형을 한 번 속여보고 싶어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2박3일은 속여야 할 것 같아요."
강기영은 조정석과 같은 행보를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사진/tvN
◇조정석·이희준·변요한이 가는 길
강기영의 지금은 어떻게 보면 배우로서 첫 발을 뗀 것이나 다름없다. 이름을 알렸으니 이제 배우로서 만개할 일만 남았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정석이형과 같은 길을 걷고 싶어요. 정석이형이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이름을 알린 뒤에 MBC '더킹투하츠'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그 이후로 '역린',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오나귀' 등으로 주인공까지 꿰찼잖아요. 저도 정석이형과 같은 길을 걷고 싶어요. 제가 상상하는 진로예요. 변요한이나 이희준도 비슷한 케이스인데, 저도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코믹한 캐릭터로 큰 웃음을 선보여준 그다. 다음 작품에서도 또 코믹한 역할을 맡게 될까. 그렇게 되면 코믹이라는 틀 안에 갇혀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해주시더라고요. 재밌는 걸 잘 하더라도 너무 재밌는 쪽으로만 가면 이미지가 고정되고 소모될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제 얘기를 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지한 역할도 잘 소화하면서 배우로서 더 성장해나가고 싶네요."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