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어느 군대 지휘관이 있었다. 전쟁을 치르던 어느 날, 병사들은 강을 건너야 했다. 강의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1.6미터였다. 지휘관은 참모에게 병사들의 평균 키를 물었다. 참모는 1.7미터라고 답했다. 지휘관은 건너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많은 병사들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 병사들의 평균 키는 1.7미터였지만, 그중에는 1.6미터 미만의 병사들도 다수 있었던 것이다. 이 어리석은 지휘관을 요즘 다시 볼 수 있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10월26일,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소시지와 햄, 핫도그, 베이컨 같은 가공육을 1군 발암물질로, 그리고 쇠고기와 돼지고기, 염소고기, 말고기 등 포유류의 고기를 뜻하는 적색육(red meat)을 2군A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국제암연구소는 발암성을 기준으로 물질을 분류하는데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 암을 유발하는 것이 확실한 경우 1군으로, ‘아마도’ 발암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될 때 2군A로,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을 때 2군B로, 발암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기 어려울 때 3군으로, 마지막으로 ‘아마도’ 사람에게서 암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4군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이번 WHO의 발표를 요약하면 “가공육은 암을 일으킬 수 있으며, 적색육은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정도가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IARC는 가공육의 하루섭취량이 50g 단위로 늘어날 때마다 대장직장암의 발병율이 18%씩 높아지며, 적색육의 하루섭취량이 100g 단위로 늘어날 때마다 대장직장암의 발병율이 17%씩 높아진다는 것이다.
가공육이나 적색육이 대장직장암의 발병률을 높인다는 사실은 이미 의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내용이다. 수많은 연구논문이 이 사실을 뒷받침함으로써 의사들 뿐 아니라 관심 있는 일반인들조차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WHO의 발표의 파장이 컸던 것은, 가공육과 적색육의 발암 위험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WHO 발표에 대한 우리 정부와 의사협회의 반응이 수상하다. 매출의 급감을 우려한 육류협회 반발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정부와 의사협회가 일선에서 파장의 진화에 나섰다.
식약처는 WHO 발표 직후인 11월2일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우리나라 국민의 가공육과 적색육 섭취 실태, 제외국 권장기준, WHO 발표내용, 육류의 영양학적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현재 가공육과 적색육의 섭취 수준은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며 “걱정할 일이 아니다”고 진화에 나섰다. 식약처는 WHO가 가공육 50g을 섭취할 때마다 암발생율이 18%씩 증가한다고 발표한 것에 비해 우리 국민 가공육 섭취량은 1일 평균 6.0g 수준으로 낮고, 1일 적색육의 섭취량도 61.5g정도로 100g에 못 미치니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식약처의 발표는 두 가지 부분에서 수상하다. 첫째, 식약처는 WHO 경고의 의미를 애써 희석시키려 했다. 가공육과 적색육의 위험성 경고를 “걱정할 수준이 아니다”라며 애써 완화시킨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의 근거가 수상하다. 식약처는 우리 국민 1일 적색육의 섭취량이 61.5g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4월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2014 농림수산식품 주요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국민 1인당 연간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 소비량은 42.7kg로 집계됐다. 적색육이 아닌 닭고기를 제외하면 돼지고기와 쇠고기 소비량만 31.2kg이었고, 이를 하루 평균으로 환산하면 85.5g이다. 그런데 이는 성인을 포함한 전 국민의 소비량이고 여러 적색육 중 돼지고기와 쇠고기만을 계산한 수치다. 따라서 20세 이상 성인의 적색육 소비량을 제대로 추산한다면 이보다 크게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통계는 식약처에 의해 61.5g으로 축소되어 발표됐다.
지난 4일 발표된 대한의사협회의 발표는 더 가관이다. 의사협회는 전문가 단체이면서도 가공육과 적색육의 유해성 논란과 관련해 식약처와 똑같이 “우려할 정도가 아니다”고 밝혔다. 더욱이 WHO 발표의 대부분 역학자료가 해외의 것이어서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 대목에서는 실소마저 나온다. 질병의 발병기전에 인종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간혹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나, 거의 모든 의학 연구는 '인체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같은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에 전문가 단체인 의협이 객관성을 잃고 뛰어든 이유가 궁금하다. 더욱이 가공육과 적색육의 섭취는 대장직장암의 발병뿐 아니라 심장병과 뇌졸중의 발병과도 명백한 연관이 있는 식품이 아니던가.
한국식품위생안전성학회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발표가 있었다. “가공육과 적색육 섭취수준을 볼 때 우려할 일이 아니다”는 것이다. 식약처와 대한의사협회, 한국식품위생안전성학회, 이들 단체는 국민건강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WHO의 경고를 주의깊게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국민건강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기관은 보이지 않는다. 이 기관들의 지휘관들이 병사의 평균 키만 생각하고 강물에 뛰어들라고 지시한 군대의 지휘관처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 정치인들에게는 축산농가의 경제와 그들의 표가 국민건강보다 중요하고, 관료들에겐 윗사람의 지시가 국민건강보다 중요하며, 이익단체들은 정부와의 뒷거래가 국민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배제할 수 없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