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현재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중 51.5%가 설립일을 기준으로 마흔살이 넘었다. 전체 평균 연령을 따져도 37.8세다. 기업도 일종의 ‘고령화’를 겪고 있는 현 시점에서, 소위 ‘크고 멍청한 회사(Big Dumb Company)’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특명이 내려졌다. 바로 ‘노화 방지’다.
LG경제연구원의 강승훈 책임연구원은 ‘노화를 잊은 동안 기업의 비결’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 기업의 이같은 현주소를 짚고, “장수 기업의 명성도 ‘혁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의 평균 연령은 최근 10년 사이 약 5세 상승했고 불혹을 넘긴 비중은 20%p 가까이 높아졌다. 반면 사람으로 치면 가장 활력이 있는 20~30대 연령의 비중은 49.6%에서 23.9%로 대폭 줄었다. 특히 제조업은 설립 40년을 넘긴 비중이 57.1%, 평균 연령 39.9년으로 집계돼 고령화가 더 두드러졌다.
강승훈 책임연구원은 “상대적으로 젊은 기업 중 제조업 비중이 낮은 것은 정상적인 산업 변화의 흐름일 수 있다”면서도 “아직 경제 전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조업 기업의 고령화가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은 경제와 산업의 활력과 연관지어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고령화 기업은 바꿔 말하면 ‘장수 기업’이다. 즉 연륜과 노하우를 무기로 전통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만큼 기업이 나이드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미국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를 구성하는 30개 우량 기업의 평균 연령은 무려 100세가 넘는다. 그러나 이들 기업이 존경받는 이유가 ‘장수’가 아닌 ‘혁신’에 있다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 유가증권시장 상장 기업의 평균 연령은 37.8세로 최근 10년 사이 약 5세 상승했다. 설립일 기준 40세를 넘긴 기업은 51.5%로 10년 전 대비 20%p 가까이 높아졌다. 인구뿐 아니라 기업의 고령화도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진/뉴시스
◇노쇠한 조직은 많이 생각하고 적게 움직인다
오래된 조직은 나이 든 인간처럼 주름과 군살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복잡하기만 한 규정과 절차, 역할과 책임이 불분명한 조직 구성은 기업의 움직임을 더욱 더디게 한다.
강 책임연구원은 “모든 규정과 절차, 조직은 나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문제”라며 “조직은 점차 느리고 무거워져 관료주의에 빠지기 쉽고, 구성원들은 경쟁자가 아닌 내부의 절차와 규정을 상대로 싸우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전세계적으로 스타트업 기업들이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유니콘’, 100억달러 이상 가치를 지닌 슈퍼 스타트업 ‘데카콘’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민첩한 판단력과 실행력이다. 기존 기업들이 아이디어를 짜내고 긴 절차를 거쳐 시장에 제품을 출시한다면 이미 스타트업이 시장을 쓸고 간 후가 될 수도 있다. 고객과 현장의 목소리가 이 장벽을 뚫는 것은 더욱 어려울뿐더러,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영진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리도 만무하다.
강 책임연구원은 “풍부한 자원과 경험을 지닌 기업이 쓰러지는 것은 너무 많이 생각하고 적게 움직이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많은 전문가들은 조직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내부 정치의 부정적 영향이 커지고 이해관계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직이 경직되고 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수많은 입김을 모두 반영해 새롭게 시도하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왕년의 성공 신화도 때로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 과거 방식에 집착해 새로운 것을 배척한다면 신사업의 싹이 마르게 된다. 초일류 기업이었던 코닥(Kodak)은 과거 필름 시장에서 거둔 성공에 집착해 디지털 카메라 시장으로의 변화를 외면했고 결국 후발주자들에게 주도권을 넘기며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탄탄한 기존 사업의 관점에서 신사업을 바라보면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지금만 바라보고 사는 조직에게 내일은 쉽게 오지 않는 것이다.
◇젊음 유지의 비결은 ‘안정과 변화의 황금비율’
오래된 조직이 활력을 되찾는 방법 중 하나는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내부 관리를 뒤엎거나 신사업을 위해 기존 사업을 팽개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들이 이미 별동 조직을 활용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GE는 지난 2014년 설립한 자회사 ‘퍼스트빌드(FirstBuild)’를 통해 가볍고 신속한 개발과 시장 테스트를 꾀하고 있다. 최근 시장에 선보인 음료수용 제빙기는 구상에서 제품화까지 단 4개월이 걸렸고 비용도 20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 퍼스트빌드는 지난 4월 외부 전문가들을 초빙해 33시간 동안 기존 가전제품을 개량해 혁신하는 이른바 해커톤(hackathon, 해커와 마라톤의 합성어)을 실시하기도 했다. 페이스북 등의 혁신기업이나 스타트업의 상징으로 여겨진 해커톤을 제조업에서 크게 연 것이다. 100세가 훌쩍 넘은 GE에 퍼스트빌드가 기여하는 재무 성과는 아직 미미하지만 구성원들의 혁신 마인드에 미치는 영향만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강 책임연구원은 “혁신과 관련된 오해 중 하나는 급격하고 전면적인 변화가 좋다는 생각”이라며 “장수기업들은 안정과 변화를 섞는 자신만의 황금비율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요란스럽기보다는 작지만 확실한 변화의 이유를 부여함으로써 긴 호흡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이다. 듀폰(DuPont)이 2010년부터 ‘매출액의 30% 이상이 최근 4년 내에 만들어진 혁신에서 나와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하고, 지속적으로 신사업 개발과 사업 포트폴리오 개편에 힘쓰고 있다는 점이 좋은 사례다.
또 힐튼 월드와이드(Hilton Worldwide)는 최근 고객의 이용 패턴을 분석해 스마트폰 앱 서비스를 본격화했다. 앱을 통해 객실을 고르고 사전 체크인을 할 수 있으며, 내년부터는 열쇠 대신 스마트폰의 스마트키 기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이같은 사례를 통해 거창한 혁신을 추구하지 않아도 고객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의 비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노쇠한 조직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다이어트가 필수다. 인력 구조조정보다는 효율적이지 못한 시스템 자체의 군살 빼기가 목적이다. 과도한 절차나 위계 등을 줄이고 이에 맞춰 인원을 조정하는 것이 순서다.
강 책임연구원은 “노쇠한 조직은 ‘전례 없는’ 사안을 두고 골치 아픈 일로 여기지만 젊은 조직에게 이는 새로운 기회와 도전거리가 된다”며 “변화에 마음이 설렌다면 나이와 관계 없이 그 조직은 젊다”고 설명했다.
김미연 기자 kmyttw@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