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서울시와 서울산업진흥원(SBA)은 미래사회 변화를 선도할 70개의 새로운 직업을 선정하고 향후 5년간 육성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선정된 직업군 중에는 디자인 관련법과 지식재산권(특허권·실용신안권·디자인권 등)을 활용·관리하며 새로운 시장창출에 기여하는 'IP(지식재산권) 디자이너'도 포함됐다.
IP디자이너 육성기관으로 지정된 디자인아이피는 지난 2013년 5월에 설립된 후 지식재산권(지재권)에 대한 인식확산 교육을 시작으로 지재권 등록 및 사업화, 거래를 통한 이윤창출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다. 예비사회적기업 인증은 지난해 10월 받았다.
사업 중 경험한 지재권 관련기억이 디자인아이피 설립으로 이어져
디자이너 출신인 전혜선 디자인아이피 대표는 젊어서부터 사업을 시작하면서 지재권 보호에 관심을 갖게 됐다. 21세에 사업을 시작한 전 대표는 자체디자인을 해서 제작·판매하던 제품을 한 문구업체가 베끼거나, 온라인쇼핑몰을 운영하던 중 외국에서 수입해 판매하던 제품에 포함된 디자인 요소에 대해 한 기업으로부터 '특허권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지금까지 취득한 이익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항의를 받는 피해를 겪어왔다.
전 대표는 "두 번째 사업의 경우 수입해서 판매하던 시점이 특허 출원일보다 1년이나 빨랐고, 그럼 특허가 승인될 수 없는 것이기에 무효심판을 걸면 되는 문제였다"며 "주위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쇼핑몰에 남아있는 후기들을 모아 답변서를 모아 보내니 이후로는 괴롭히는 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세 번째 사업인 디자인회사 운영 중에는 한 대기업을 찾아가 진행한 프레젠테이션이 독이 됐다. 본인이 발표한 내용의 서비스를 해당 회사에서 3개월 후 그대로 출시한 것이다. 지재권을 미리 등록해놓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같은 과정을 겪으며 전 대표는 "당시의 나처럼 지재권에 대해 무지한 디자이너가 태반인 상황에서 이들을 돕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연간 2만5000여명에 이르는 디자인 전공자들이 졸업전시회 때 제출하는 작품을 비롯해 각종 디자인들은 공개 후 6개월이 지나면 법적으로 자유디자인으로 간주, 타인의 무분별한 도용을 막을 수 없게 되어있다. 12개월이 지나면 특허권 출원도 불가능하다.
상당수 디자이너들이 지금도 지재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사전에 지재권을 출원해놓지 않은 상태로 정부나 각종 단체가 성과보고집 형태로 각종 디자인을 일반에 공개하는 식으로 아이디어가 노출되고 있다.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만든 디자인이 불과 1년여 만에 허사가 되는 일이 지금도 발생하는 것이다.
전 대표는 "개인의 창작물이 이런 방식으로 공유재산화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지재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렇게 보호받은 각종 권리들이 사회적기업에 도움이 되도록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생·일반인 대상 강의로 지재권 중요성 알리는 중
이를 위해 디자인아이피 설립 전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온오프믹스를 통한 공개강의로 시작했지만 점차 반응이 좋아지다 보니 디자인학과가 있는 서울 내 대학과 연계한 수업도 속속 개설됐다. 지금은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의 겸임교수로 있다. 전 대표는 "대학생과 일반인을 아우르는 강의를 진행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는 지재권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이나마 높아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 인력을 양성하는 일에도 나서고 있다. 현재 1기 교육이 진행 중인 IP디자이너 양성과정에서는 개인이나 기업이 창출한 디자인을 지재권을 통해 보호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전 대표는 "현재 특허업계에서 디자인 관련 업무를 법조인들이 하거나 공대를 졸업한 변리사가 담당하는 식의 문제가 있다"며 "법을 아는 디자이너를 양성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설명했다.
총 200시간의 교육과정에는 디자인과 지재권에 대한 기초개념부터 아이디어 생산을 위한 활동(아이데이션) 워크숍, 디자인권·특허권·상표권 출원 실무, IP디자이너 입문 등을 포함했다. 교육을 이수하고 자격검정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해당 산업의 전문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특허사무소 등에서 현장실습까지 진행한다. 교육 진행은 전 대표를 비롯해 현직 판사와 변호사, 변리사들이 담당해 신뢰도를 높였다. 아이데이션을 통해 생긴 아이디어를 특허로 발전시키거나, 디자인권은 하나씩 출원해 보호받는 과정을 통해 지재권의 중요성을 일깨우도록 했다.
서울 봉천동 관악구청 내 일자리카페에서 IP디자이너 양성과정 수업이 진행되는 모습. 사진/디자인아이피
또한 교육을 통해 발굴된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기업이나 소셜벤처에게 우선 제공하는 것도 원칙이다. 전 대표는 "사회적기업 중 디자인아이피가 보유한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곳에 특허권·디자인권 등을 파는 것"이라며 "디자인 연구개발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강점을 살려 미리 디자인들을 만들어놓고, 필요로 하는 회사는 최종 결과물을 보고 특허 등록확인까지 마친 다음 권리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디자이너도 지금까지 들인 창작의 노력을 정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아이피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각종 지재권은 총 500여건에 이른다. 실제 거래를 통한 수익창출도 일어나고 있다. 디자인아이피로부터 권리를 이전받은 사회적기업이 개발한 제품이 아시아 디자인 어워드(DFAA)나 레드닷어워드 등에서 수상하는 성과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지재권 보호인식 갈길 멀어… IP인협회 설립으로 산업 확대노력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지재권 보호나 거래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한 점은 문제로 꼽힌다. 전 대표는 "디자인과 지재권의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고 있음에도 국내 굴지의 기업 내 IP부서에도 디자인담당자가 없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대학 내 IP강좌와 유사한 형태의 '권리보호 워크숍'과 관내 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특허출원까지 돕는 '청소년 창의발명단'을 운영 중이다.
서울시내 한 학교에서 학생대상 '청소년 창의발명단'이 진행중인 모습. 사진/디자인아이피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기업을 일일이 찾아가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성된 디자인을 전시하고 마음에 드는 기업가들이 구입토록 하는 'K디자인옥션' 행사도 진행 중이다.
전 대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IP디자이너가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위해 개선해야 할 사안들은 지난해 설립한 디자인IP인협회를 통해 해결해나갈 방침이다. 전 대표는 "현 디자인법은 법학자와 이공계쪽 인사들이 만들어 여러 가지 맹점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책꽂이에 끼워둘 수 있는 A4 용지 모양의 조명을 디자이너들은 창의적이라고 보지만 법에서는 그저 직육각형 형태로 치부되고 지재권 등록이 안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점들을 협회설립을 통해 해결해나가겠다는 것이다.
디자인아이피의 경우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식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측했다. 전 대표는 "몇 년 전만 해도 남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있는 지재권 분야에 집중하고, 필요한 일들을 챙기다보니 디자인 거래와 같은 비즈니스 모델도 덩달아 늘어난 것"며 "사회적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디자인을 매개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다보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최한영 기자 visionch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