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내수 의존도가 높아 소비 부진의 타격이 큰 데다, 대기업들이 하나 같이 원가절감에 나서면서 납품단가 또한 크게 낮춰졌다. 일각에서는 회사 사정이 나빠진 틈을 타 횡령 등 경영진의 비리가 더해지는 등 내우외환의 처지다.
중소기업중앙회가 매년 5월에 발표하는 '중소기업 위상 지표'에 따르면 중소제조업의 재고지수는 2011년 생산지수를 앞지른 이후 그 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2014년 기준 생산지수와 재고지수 격차는 11.1로, 외환위기 직후인 2009년 격차(6.8)보다 커졌다. 2011년 이후 생산지수는 정체를 보이고 있는 데 반해 재고는 계속해서 누적되는, 재고과잉의 심화다.
문을 닫는 중소기업도 점차 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2012년부터 발표한 기업생멸 행정통계에 따르면, 2013년 말 기준 연매출 400억원 이상의 중소기업 가운데 소멸된 곳은 38곳이다. 전년(31곳)보다 7곳 늘어났다. 소멸된 기업 가운데 연매출 1000~1500억원 사이의 중견기업도 2곳이나 된다. 소멸기업은 당해연도와 차년도의 활동 영리기업 비교를 통해 경제활동을 중지한 기업으로, 폐업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매출액과 상용근로자가 없는 상태가 1년 이상 지속되면 소멸기업으로 최종 분류한다.
보루네오(004740)와
현대페인트(011720)는 장기 불황으로 회사 경영사정이 극도로 악화된 데다, 경영진의 방만경영까지 더해지면서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양사 모두 50년 역사와 함께 한때 해당업종을 대표하던 명문기업이다.
1980년대 가구업계 1위였던 보루네오는 1988년 상장 이후 3년 만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철저한 준비 없이 해외로 무리하게 영업을 확장한 것이 원인이었다. 가구 수요 감소와 투자 실패로 2013년 또 한 번의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이듬해 4월 11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졸업하며 경영정상화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주가조작 혐의로 전 최대주주가 구속기소되면서 충격에 빠졌다.
두 번의 법정관리와 잦은 경영진 교체 등 위기가 이어지면서 실적도 줄곧 하락했다. 금융위기 이전까지 연매출 2000억원에 달했던 보루네오는 2014년 연매출 540억원에 그쳤다. 400여명에 달했던 직원도 현재 170여명만이 회사에 남아있는 상태다.
경영정상화가 요원하자 소액주주 집단은 현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는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섰다. 보루네오는 소액주주들이 요구한 이사와 감사 선·해임 안건을 부결시키며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회사 사정이 외부에 고스란히 알려졌다. 또 향후 법정분쟁의 불씨도 남기는 등 앞길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현대페인트 노조는 지난 4일부터 인천 부평에 위치한 현대페인트 본사에서 천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임효정 기자
1960년 설립과 함께 20년가량 연 15%의 고속성장을 이어왔던 현대페인트 역시 좌초 위기에 놓였다. 이달 중순부터는 공장가동이 중단될 처지로, 다음달부터는 120여명 직원의 임금 지급 여부도 불투명하다. 8일 기자가 찾은 현대페인트 본사 앞 마당은 추운 날씨 속에 조합원들의 천막농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앞서 지난 4일 농성장을 설치한 노동조합은 더 이상 투기자본의 '먹튀' 행태가 이어지지 않도록 상장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현대페인트는 지난 1998년 부도를 맞은 이후 20여년간 네 차례의 매각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최대주주들이 회사 매각을 통해 시세차익을 남기고 도망치는 사례가 이어졌다. 최근 1년새 6번의 대표가 바뀌는 등 경영진 교체도 빈번하게 이뤄졌다. 지난달 초에는 현대페인트 전 대표이자 최대주주인 이모씨가 시세조종과 부정거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현재 등기상 대표이사는 회사 인감과 기밀문서를 가지고 자취를 감춘 상황이다.
현대페인트는 지난해 8월 야심차게 부산항 면세점 사업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적자폭이 커졌다. 2014년 27억원이던 영업손실은 지난해 50억원으로 두 배가량 늘었다. 면세점사업은 시작부터 내실보다는 주가 부양에만 목적이 있었다는 평가다. 현대페인트는 면세점사업권 입찰과정에서 부산항만공사가 제시한 최저가(18억3900만원)의 2배가 넘는 40억1000만원을 연간 임대료로 제시하는 등 회사 재무사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고상인 현대페인트 상무이사(영업본부장)는 "지난 20여년간 투기자본들이 회사의 정상적인 발전보다는 주식으로만 이익을 추구해왔다"며 "페인트 사업에 전념할 건실한 투자자를 찾아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상장 폐지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백필규 중소기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해당 정보를 구성원들에게 공유해야 하는데, 중소기업 가운데 이를 지키지 않고 원맨 경영을 하는 곳들이 꽤 많다"며 "이러한 경우 외부 환경과 기술 등으로 한때 높은 성장을 기록하더라도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부에서는 투명경영에 기초한 비전 공유가 이뤄지고, 외부와는 부족한 힘을 서로 합해 경쟁력을 높여가는 오픈경영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임효정 기자 em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