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두산의 자랑이듯, 두산은 그대의 자랑이어라'. 신입사원들이 입사하면 선배들이 이렇게 말해줍니다. 어이없죠. 헛웃음만 나옵니다. 이런 말에 17년을 바쳤네요."
퇴직 때 심정을 묻는 질문에 장민구(가명·44)씨는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장씨는 지난해 9월, 17년간 정들었던 두산인프라코어를 떠났다. 중공업에 불어 닥친 불황과 밥캣 인수(49억달러) 여파로 회사 자금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던 때였다.
"지난해 봄에 한 번 희망퇴직을 받았고, 가을에 또 부장급 희망퇴직을 실시했어요. 그때 회사를 나왔습니다. 언제부턴가 평생직장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선배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곧 내 차례로 오겠거니 하고 마음은 먹고 있었습니다."
퇴직 당시 회사가 제시한 희망퇴직 조건은 위로금 18개월분 지급에 자녀 학자금 3년분 지원 등이었다. 조건도 취약했지만, 장씨는 무엇보다 회사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대해 화가 났고 서운함을 떠난 배신감까지 들었다고 한다.
"회사 부실은 오너와 경영진의 책임인데, 밑에 사원들이 책임을 지라는 태도에 '그동안 이런 회사를 믿고 다녔나' 하는 기분이었다"며 "대규모로 인원을 정리하다 보니 직급이나 고과, 나이보다는 자르기 쉬운 사원, 대리, 특히 여직원이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또 "퇴직 거부자에 대해서는 조직에서 따돌리는 일도 빈번했다"고 설명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4차례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퇴직 거부자들에게는 ▲집에서 먼 지역의 연수원 강제 입소 ▲용변 횟수 제한 ▲휴대폰 압수 ▲조퇴 및 연·월차 사용불가 등의 조치가 있었다는 증언들도 이어졌다.
장씨는 퇴직을 거부하면서 20년 지기 동료들과 얼굴을 붉히느니 차라리 도장 찍고 나왔다고 했다. 17년을 바쳤지만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회사라면 하루라도 빨리 벗어자나는 마음도 있었다. 장씨는 두산을 '자긍심보다 배신감만 준 회사'로 기억한다.
장씨는 올해 처음으로 실업자가 됐다. 퇴직 넉 달째, 앞으로가 걱정이다. "선배들 보니까 위로금, 퇴직금 받아도 소용없더라고요. 어차피 그 돈으로 평생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새 일부터 찾아야죠. 아까 퇴직 때 심정 물어봤죠? 말이 희망퇴직이지, 희망해서 하는 퇴직이 어디 있겠어요?"
지난해 2월 180명, 9월 200명, 11월 450명에 이어 12월 702명이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두산인프라코어를 떠났다. '사람이 미래'라는 두산의 경영철학은 이 같은 현실 앞에 빛이 바랬다.
◇두산인프라코의 주력 굴삭기. 사진/뉴시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