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대륙에 우경화의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11월22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야당인 중도우파 공화주의제안당(PRO) 소속의 기업가 출신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비슷한 시기 베네수엘라 총선에서는 보수우파 야권연대가 의회 과반의석을 차지했고, 브라질에서도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좌파정부가 집권 12년 만의 위기를 맞고 있다. 칠레 역시 온건 중도좌파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의 지지도가 85%대에서 20%대로 급락하는 등 남미 좌파정부들이 일제히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최양부 전 주아르헨티나 대사의 진단을 통해 알아본다.(편집자 주)
지금 남미에 불고 있는 우경화 바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난 2000년 이후 약 15년간 남미대륙을 붉게 물들여온 ‘핑크 타이드'(Pink Tide. 분홍물결)란 남미 좌경화 현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98년 베네수엘라에서 혁명지도자 우고 차베스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남미 대륙의 분홍물결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2000년 칠레, 2003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2005년 볼리비아와 우루과이, 2006년 에콰도르, 2008년 파라과이, 2011년 페루에서 좌파정부가 집권에 성공하면서 남미대륙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그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1980~90년대 남미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정부와 그 보수우파 정부에 의한 인권탄압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던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여기에 보수우파정부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실패도 큰 영향을 줬다.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스페인 300년 식민통치가 남긴 부정적 유산 1:99% 불평등 사회가 있고, 남미를 자신의 앞마당으로 만들기 위해 남미의 정치경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온 미국과 거기에 저항해온 반미주의 정서가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에 등장한 신좌파는 과거의 이념적 평등을 주장하며 혁명을 외쳤던 투쟁적 좌파와는 달리 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시장개방 등 세계화의 조류를 수용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저소득 빈곤층을 지원하는 유럽식의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즉 남미의 좌경화 현상에는 스페인 식민시대 이후 세습화된 불평등 사회구조를 혁파하고, 미국의 식민주의적 남미지배에서 벗어나 남미공동체를 결성해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좌파 지식인과 노동자들, 그리고 절대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서민들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미 좌파정부는 약 15년 만에 국민 신뢰를 잃게 되었는가.
아르헨티나를 예로 들자면, 키르츠네르 대통령 부부가 집권한 12년 동안 좌파정부는 국제 곡물가격과 원자재가격의 상승으로 확보한 재정을 기반으로 절대빈곤층 감소를 위한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원자재가격이 하락하자 정부는 복지재정 확보를 위해 밀, 옥수수, 콩, 쇠고기, 수산물 등 주요 수출 농축수산물에 대해 수출세 세율을 인상하거나 신설했다.
그러한 수출세 부과는 사실 마땅한 수출용 공산품이 없는 아르헨티나의 오래된 관행으로 정부재정의 약 25% 이상을 점하고 있다. 또한 1%의 세습화된 대지주를 겨냥한 세금 부과라는 측면에서 소득재분배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수출세의 과도한 부과는 농업생산 활동의 위축을 가져왔고 수출보다는 국내비축을 촉발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여기에 국제 곡물가격의 하락과 중국경제의 침체 등이 더해지면서 그동안 중국에 경도되어 온 아르헨티나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경기침체를 맞게 되었다. 경제불황과 저성장 속에 수출세 인하를 요구하는 농업계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생활고에 처한 서민들마저 여기에 합세하면서 좌파정부는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됐다.
국민들이 좌파정부에 등을 돌리게 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은 키르츠네르 정부의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이 있었다. 대통령과 그 가족과 측근 실력자들 사이에 만연된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등 좌파정부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국민적 실망도 있다.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타고 보수우파 마크리 후보가 내건 ‘바꾸자'(Cambiemos)라는 선거구호가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표심을 움직여 보수우파 정권 창출에 성공한 것이다.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브라질, 칠레 등 다른 남미 국가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대부분이 농산물, 석유, 광산 등 원자재 수출에 의존해 국가재정을 꾸리며, 생활 물자 등 공산품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식민지형 종속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식민지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사회적 불평등구조로 대다수 국민들은 낮은 소득과 고물가로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1980~90년대 우파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실험은 남미국가를 경제파탄 상태로 이끌었다. 아르헨티나의 2002년 국가부도는 1940~50년대 집권한 후안 페론 정부의 복지정책 때문이라기보다, 1960년대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나라를 파국으로 이끈 군사독재 정부와 1990년대의 카를로스 메넘 정부의 정책 실패가 남긴 결과였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파탄에 빠진 나라를 인수받은 2000년대 좌파정부들은 높은 국제 원자재 가격에 힘입어 혁신과 변화를 통해 경제를 정상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특히 절대빈곤의 악순환에 빠진 서민경제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복지정책과 고용정책 등을 통해 경제를 쇄신시키면서 경제성장을 만들어냈다. 2000년대 집권한 좌파정부들 대부분이 10년 넘게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공한 복지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미래연구원
지난해 12월17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남성이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항의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마크리 대통령은 이날 외환규제해제를 발표했으며,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달러화 대비 36%나 폭락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