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세이)태릉선수촌 철거 전 대화가 필요하다

입력 : 2016-02-03 오후 2:37:21
[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고교야구 전성기로 불리는 1970년대엔 고(故) 최동원, 박노준, 김건우 같은 선수들이 운동장을 수놓았다. 오빠 부대의 함성과 더불어 넥타이 부대들의 교가가 매번 울려 퍼졌다.
 
1976년 박스컵 축구대회에서는 차범근이 '7분의 기적'을 연출했다. 축구대표팀이 말레이시아에 1-4로 뒤지고 있었는데 경기 종료 7분을 남기고 차범근이 3골을 넣으며 무승부를 연출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는 소위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야구의 매력이 팬들을 휘감았다. 그날 MBC청룡의 이종도는 삼성을 상대로 연장 10회 말 끝내기 만루 홈런을 치면서 프로야구의 힘찬 출발을 알렸다.
 
이 모든 감동과 환희가 터져나온 곳은 바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동대문운동장이다.
 
한국 스포츠의 중심지로 불리던 동대문운동장은 그 자체로 추억이자 역사다. 1986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200m 한국신기록(20초41)을 세운 장재근과 1984 LA 올림픽 농구 은메달의 주인공 박찬숙 모두 자신들의 뜨거운 땀이 스민 곳으로 동대문운동장을 꼽았다.
 
그러나 동대문운동장은 1926년 경성운동장이란 이름으로 탄생한 이후 82년 만인 2008년에 철거됐다. 오세훈 당시 서울 시장이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이라는 계획에 따라 전혀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바꿔놨다.
 
전국에서 몰린 이들의 구수함과 정감이 있던 그곳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라는 희한한 이름의 최신식 건물로 바뀌었다. 지하철 '동대문운동장 역' 또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으로 탈바꿈했다. 이따금 일본이나 중국 관광객 사이에서 사라진 운동장 터를 바라보고 있으면 과거와 현재 사이 거리감이 더욱 아득하게 느껴진다.
 
동대문운동장을 떠올린 이유는 최근 위기에 처한 태릉선수촌을 이와 함께 묶어서 보는 시각 때문이다. 현재 체육계에는 태릉선수촌의 미래가 동대문운동장과 같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퍼져있다.
 
유네스코는 2009년에 태릉선수촌 위치가 태릉(중종 계비 문정왕후 묘)과 강릉(명종·인순왕후 묘) 사이에 있다며 왕릉의 원형을 복원하라고 문화재청에 권고했다.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당연히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와 문화재청의 입장이 묘하게 갈렸다. 애초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내년 진천선수촌 완공을 앞두고 이르면 오는 8월부터 태릉선수촌은 철거된다. 다만 지난해 서울시가 '서울 미래유산'으로 태릉선수촌을 지정하면서 이러한 철거 계획이 실제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서울시가 태릉선수촌 또한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하면서 무조건적인 철거에는 일단 제동을 건 상태다.
 
행정구역상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태릉선수촌은 1966년 6월 설립 이후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한국 체육의 역사를 돌아볼 때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스포츠 정책을 되짚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석에서 만난 한 체육학과 교수는 "체육사를 논할 때 태릉선수촌 빼면 할 얘기가 없다"고까지 했다. 올림픽 메달 대다수는 태릉선수촌에서 선수들이 흘린 노력의 열매다. 
 
물론 한쪽에선 태릉선수촌을 두고 "독재정권 시절에 엘리트 체육인을 길러내기 위해 생긴 곳"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일견 맞는 이야기이나 일부 부정적 측면이 있다고 해서 전체를 아예 지워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태릉선수촌의 경우 '사실로서의 역사'와 '해석으로서의 역사'는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왕가의 묘가 문화재이자 역사라면 한국 체육사를 관통하는 태릉선수촌도 문화재이자 역사다. 최근 체육계 의견을 들어보면 태릉선수촌 전체가 철거될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진천선수촌 이전 이후에도 역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일부를 남겨둘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몇몇은 아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도 보인다.
 
그러나 동대문운동장 철거 얘기가 나왔을 때도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던 체육계 인사들의 여론은 어찌 된 영문인지 철거론 앞에서 눌려버렸다. 생산유발 3147억원, 고용유발 3070명, 30년간 총생산유발 23조원, 30년간 고용유발 20만명, 건립 후 10년 이내에 서울 패선 산업 매출 증대 20조원과 같은 '통계의 속임수'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집회와 동대문운동장을 지켜내야 한다던 체육계 일부의 목소리는 그렇게 뒤로 밀렸다.
 
문화재청이나 문화계 쪽에선 여전히 원안대로 태릉선수촌이 철거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다. 결국 해답은 체육계와 문화계의 넓고 깊은 소통이다. 체육계가 동대문운동장을 잃어버렸던 아픈 기억을 되살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대화로 조율하며 그 세세한 과정을 일반 시민들에게도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 세심하지 못한 결정이 위로부터 내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현명한 절충안을 길어낼 때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 오륜관에서 열린 2016 국가대표 훈련개시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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