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후견인제도'가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의 변수로 떠오르면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독일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착돼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7월 도입돼 올해 3년차를 맞고 있지만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치매 등 정신과적 환자를 백안시하거나 쉬쉬하는 사회적 관습과 문화가 관련법 개정 등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토마토>는 외국과 우리나라의 비교를 통해 3회에 걸쳐 성년후견제의 갈 길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2007년부터 치매를 앓고 있던 김모(73·여)씨는 2012년 관절염으로 입원했다가 돌연 퇴원했다. 40여 년간 그를 부양해 온 양아들 송모(44)씨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결과 김씨는 남동생 집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씨 역시 송씨를 찾았지만 남동생과 다른 가족들이 제지했다. 그 기간 김씨는 상가건물 등 자신의 재산 관리를 동생들에게 위임하고 송씨에게는 한푼도 상속하지 않겠다는 증서를 썼다. 송씨는 김씨에 대한 금치산선고심판을 청구했고 법원은 임시후견인 동의 없이는 김씨의 재산을 처분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법원 결정문을 받은 당일 김씨 남동생은 지인에게 상가건물을 헐값에 넘겼다. 송씨는 법원에 다시 성년후견개시를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변호사를 김씨의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다. 성년후견으로 지정된 변호사는 김씨 남동생 등을 상대로 소송을 내 김씨의 재산을 모두 찾아왔다.
올해 도입 3년차를 맞는 성년후견인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사람"을 위한 제도다. 정신제약에는 치매 등 중증의 정신질환이나 발달장애도 포함되지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특히 치매노인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치매노인의 미약해진 판단능력을 악용해 가족이 재산을 빼돌리는 사례가 최근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법원과 관계 당국에 따르면, 후견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 중 80% 이상이 치매노인인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치매노인들이 성년후견인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문 형편이다. 재력이 부족한 노인은 당장 후견인에게 지급할 활동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재산이 있는 노인은 성년후견제도를 잘 모르거나 활용을 꺼리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남에게 맡기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돌봐주는 가족들에게 눈치가 뵌다.
그럼에도 성년후견 신청은 증가 추세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성년후견제 도입 이후 지난해 12월 말까지 총 4089건의 성년후견 신청이 전국 각 법원에 접수됐다. 같은 기간 접수된 한정후견 393건, 특정후견 408건, 임의후견 12건에 비해 절대적인 수치다. 성년후견 신청 건수는 제도가 도입된 2013년 7월 이후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후견인의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치매노인 인구(보건복지부 추산 2015년 기준) 64만8000명에 비춰보면 0.0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성년후견 신청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 뒤를 받쳐 줄 시스템이 사실상 전무한 현실이 문제다. 특히 자식이 없거나 홀로 사는 치매노인은 성년후견제로 가장 보호되어야 할 대상들이지만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이 가족 대신 소송을 내, 공공후견인을 선임해줄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시 경우만 봐도 관내 25개 구청 가운데 치매노인을 위해 성년후견 청구 업무를 수행하는 부서를 둔 곳은 한 군데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강남구와 도봉구 등 일부에서 장애인복지팀 등을 두고 후견 신청 업무를 하고 있지만 노인에 대해서는 같은 사업을 하는 곳이 전혀 없었다. "향후 신설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25개 구청 대부분은 "없다"고 답했다. 일부는 "복지부나 서울시 등 상급기관의 정책에 따를 것"이라며 수동적인 입장을 보였다.
현장의 뒷받침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제도의 '컨트롤타워'를 맡고 있는 사법부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성년후견제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하려면 후견감독인의 의무화가 필요한데, 아직 의무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사법부는 감독인 선임 등 관련 업무를 하고 있음에도 별도의 예산이나 인력 등을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2014년 7월 이후 지난해 12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성년후견인 2366건을 포함해 한정(302건), 특정(368건), 임의(5건) 등 총 3041건의 후견감독인 신청이 법원에 접수됐다. 이 가운데 803건(성년후견 611건)으로 전국에서 신청 건수가 가장 많은 서울가정법원의 경우 이 업무를 가사조사관 2명이 맡아 처리했다. 후견감독인의 수요는 피후견인이 사망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년 누적되기 때문에 조치가 시급한 상황이다.
반면, 독일과 일본 등 한국 보다 앞서 성년후견제를 도입한 국가에서는 사법부 내 후견센터를 두고 기관 차원에서 감시기능 등을 맡고 있다.
가사소송 전문 이현곤 변호사(46·연수원 29기)는 "매년 약 1000건씩 누적되는 후견사건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감독센터가 민간에 별도로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변호사는 "국내에서 이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곳은 성민복지재단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성민복지재단은 국내 1호의 발달장애인 후견인을 배출한 기독교 기반의 민간단체로, 후견인 양성교육과 후견감독인 업무 등을 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사법부 내 성년후견센터를 마련해 30여명이 성년후견 관련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센터의 역할은 소송 신청단계부터 감독까지 전 기능을 아우른다. 사법부에 감독기능을 두면 권한을 지닌 법원의 특성상 신속한 조치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장진영 서울가정법원 공보판사는 "성년후견제가 안착하기 위해서는 사법부 내 별도의 성년후견센터를 만들어, 여기에 전념할 수 있는 인력과 재원을 배치하는 방안 등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제8회 치매 극복의 날을 맞은 지난해 9월2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치매, 바르게 알고 희망을 이야기합시다' 행사에서 노인들이 치매예방을 위한 문제를 풀고 있다. 사진/뉴시스
방글아 기자 geulah.b@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