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이 이어지던 24일 아침까지만 해도 화제 인물은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었다. 첫 토론자로 나온 그는 전날 저녁 7시 6분부터 이날 0시 39분까지 5시간 33분간 쉬지 않고 발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은 바뀌었다. 김 의원과 국민의당 문병호 의원에 이어 세 번째 토론자로 나선 더민주 은수미 의원은 이날 새벽 2시 30분부터 낮 12시 48분까지 10시간 18분간 발언했다. 은 의원은 중간중간 목과 다리, 허리를 풀어주며 토론을 이어갔다.
은 의원의 토론이 그칠 줄 모르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서 응원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는 자신의 트위터에 “은수미 대단하다. 힘내라!”는 글을,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울컥한다. 내가 아는 은수미는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은 의원은 “(어떻게 하면) 같이 살까, 이 생각 좀 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피를 토하는’과 같은 날선 표현을 말고 어떻게 하면 화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할 수 있는지, 응원하고 격려할 수 있는지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토론을 마친 뒤 같은 당 김현 의원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이종걸 원내대표, 전순옥·임수경 의원 등과 포옹을 나누고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국가정보원의 광범위한 정보수집을 허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테러방지법에 대해 은 의원은 “법이 통과되어도 언젠가 바꿀 수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 고통을 당할지도 모른다”며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받는 방법을 정부·여당이 찾읍시다”는 말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지난 1992년 당시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정책실장이었던 그는 노태우 정부가 사노맹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면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장 절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이 이번 필리버스터 발언 내용에 녹아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은 은 의원에게 “의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다”며 “그런다고 공천 못받아요”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자 은 의원은 “김 의원은 공천 때문에 움직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전날 저녁 8시부터는 국회 앞에서도 '시민 필리버스터' 행사가 진행돼 야당 의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시민 필리버스터에는 일반 시민들은 물론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주민 변호사, 정의당 조성주 미래정치센터 소장 등도 참여했다. 국회 내 필리버스터 첫 토론자였던 김광진 의원은 이곳에도 모습을 보였다. 백가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간사는 자유 발언에서 “유엔에서도 테러를 막는 과정에서 시민의 기본권이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며 “우리 국회도 그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간사는 “참여연대 홈페이지에서 진행 중인 테러방지법 반대서명에도 24일 오후 1시 기준으로 1만5000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47년만에 처음 선보이는 필리버스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정부와 여당은 야당 때리기에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고서야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이야기인가”라며 야당을 비판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도 “더민주가 우리 안보마저 무방비 상태로 만들려 하고 있다”며 “국회선진화법 통과로 40년 만에 도입된 필리버스터 첫 작품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법안 저지라는 점에 경악한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최고위원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여당과 이를 막아서는 야당의 모습은 19대 국회 내내 국민을 실망시킨 무능함 그 자체”라며 여·야를 싸잡아 비난했다.
최한영 기자 visionchy@etomato.com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오른쪽)이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10시간 18분에 걸쳐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을 진행한 후 이종걸 원내대표와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