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소식이 하나둘 찾아들고 나무들에는 녹색기운이 살아나고 있다. 봄이 다가오는 신호이리라. 내일은 3월1일, 매년 봄과 함께 찾아오는 역사, 1919년 만세운동의 첫 날이다. 물리적으로는 독립을 이루었으나 정치·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강대국들의 입김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상기되는 오늘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정신은 우리 안의 어딘가에 살아있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그 정신이 발현되지는 못하더라도 나무에 새순 돋듯이, 언젠가 언 땅 뚫고 나오지 않겠는가.
잘 알려진 이야기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3.1절과 관련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를 묻는다면 아마도 유관순일 것이다. "흑성산 밑 목천 만화천 감돈다 / 열여섯살 소녀 유관순 / 매봉에 올라 / 그녀가 보낸 봉화에 호응 / 천안 / 안성 / 진천 / 청주 / 연기 / 목천 여섯 곳을 / 산봉우리마다 봉화가 오르는 감격에 벅차랴 // 그뒤 아우내장에 모여든 만세소리 / 일본 헌병의 발포 / 일본 경찰의 폭거 / 조선의 남녀노소 마구 쓰러졌다 // 유관순 체포되었다"('유관순', 19권). 이 짧은 몇 구절 안에는 여러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다. 천안의 흑성산과 같은 지리적 정보가 유관순의 고향을 알려주고, 그녀가 매봉에서 봉화를 올림으로써 주변지역들로부터 응답을 받아 다음날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명이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빛을 내며 옥사 안을 수놓고 있다. 사진/뉴시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으로 인해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에 돌아와 있던 이화학당 여학생 유관순은 음력 3월1일, 즉 양력 4월1일, 3.1 만세운동의 후속인 이 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되어 일제의 기록에도 쓰여있듯이 '옥중타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고은시인은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형상화하고 있다. "총대 얻어맞아 / 어린 등뼈가 튀어나왔다 / 젖가슴 칼에 찔려 / 옆구리 등짝으로 관통 피고름이 나왔다 / 자궁도 파열 / 그런 몸으로 감방에서 만세를 불렀다 / 다음해 1920년 9월 28일 새벽 / 먼동 튼 철창 바라보며 눈감았다"('유관순', 19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한편 유관순보다 우리에게 덜 알려진 이야기들도 있다. 만세운동은 전국적이고 전민중적인 것이어서 걸인들도 기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3·1독립만세의 함성 / 온 나라에 퍼져나갈 때 / 거지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태극기 들고 일어났도다 / 우리가 유리전전 문전걸식하게 됨은 / 왜가 우리의 재산을 빼앗은 데 있음이로다 / 우리 민족 2천만 동포가 / 왜의 압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 모두 구렁텅이에 빠짐이로다 / 누가 써준 대로 외치며 / 독립만세 독립만세 외치며 / 진주 장날에 들이닥쳤도다 / 비봉산 꼭대기에 올라가 나팔 불어 사람을 모았도다 / 기미년 3월 18일 음력 2월 17일 / 그날 밤중까지 거지들 만세소리 흩어질 줄 몰랐도다 / 왜헌병 경찰 마구 달려와 / 총 놓고 때리고 밟고 해도 / 거지독립단이 일으킨 만세군중 흩어질 줄 몰랐도다"('걸인독립단', 2권).
고은 시인 육필원고 '걸인독립단' 초안. ⓒ고은재단
고은 시인 육필원고 '걸인독립단' 초안. ⓒ고은재단
한편 3월19일에는 진주 기생들이 촉석루를 향해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여 6명의 기생이 구금되는데, 그들 중 기생 한금화는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혈서를 썼다고 한다. 참으로, 1593년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촉석루 바위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진주기생 논개의 후예가 아니던가.
<만인보>에는 수원기생조합의 만세시위가 그려져 있다. "수원기생조합 기생 50명이 / 기미년 3월 29일 / 자혜병원으로 정기검진 받으러 가던 중 /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 병원으로 가서도 / 검진 거부하고 /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외쳤지요 / 만세 부른 기생들 다 붙잡혀가서 / 김향화는 6개월 징역 받아 콩밥 먹었지요 /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 면회 가서 /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 … /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 따라도 /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기생독립단', 2권) 이 시를 읽으면 김향화의 고고한 지조와 기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생조합의 만세운동은 계속되어, 이밖에도 4월1일 해주기생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시위군중들이 크게 늘어나고 8명의 기생이 구속되었다. 또한, 4월2일에는 통영기생들이 금비녀와 금팔찌를 팔아 소복을 마련해 입고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맨 채 만세시위를 하였고 3명이 구속되었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위장결혼식
한편, 같은 시기 평양의 모습은 이러하다. "1919년 3월 1일 / 평양은 / 서울보다 한 시간 앞서 / 오후 한시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 여학생 20여명 / 신대한의 애국청년 끓는 피가 뜨거워… / 하고 혈성가를 불렀다 // 한 여학생은 '2일 만수대'라는 쪽지를 받았다 / 만수대에서 만세를 불렀다 // 혈성(血誠)의 처녀 / 박현숙의 새로운 계획 // 3월 3일 남산현 예배당에서 / 신식 결혼식이 거행된다는 소문이 퍼진 뒤 / 연미복 신랑과 / 면사포 신부가 나란히 걸었다 / 소녀 들러리 꽃다발 안고 앞장서 걸었다 // 신부신랑 탈 인력거 대기 // 사람들 모여들었다 / 웅성웅성 / … / 신식 결혼식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 누군가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 신랑 / 신부도 만세 불렀다 / 들러리 아이들도 만세 불렀다 // 이 위장결혼식 만세사건이 60여년 뒤 / 서울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 / 민주화운동 집회로 이어지다 말다"('위장결혼식', 19권).
박현숙(1896~1980)은 1903년 미국 북장로 선교회의 마포삼열 목사(1864~1939, Samuel Austin Moffet)가 설립한 숭의여학교 출신으로, 1913년에 결성된 항일 여성비밀결사조직 '송죽회(松竹會)' 또는 '송죽결사대'라 불리는 조직의 일원이었다. 송죽회는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김경희와 황에스더(황신덕, 황애덕), 졸업생 안정석이 주축이 되어 애국적인 재학생들을 선발해 만든 조직으로, 독립군의 자금을 지원하고 교회를 통한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후 대한애국부인회의 전신이 된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남산현교회 목사 신홍식은 이 송죽회에 3.1 만세시위에 쓸 태극기 제작을 부탁한다. 평양의 남산현교회는 남산재교회라고도 하는데, 1893년 캐나다 출신 의사이자 미국감리교 선교사인 제임스 홀(W. J. Hall, 1860~1894)과 한국 최초의 두 목사들 중 한명인 김창식(1857~1929)이 설립하였다. 평양의 3.1독립운동은 13시 남산현교회, 장대현교회, 숭덕학교 등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당시 북한에서 개신교 교회와 학교들이 이 운동에 큰 역할을 했음을 볼 수 있다.
앞의 시가 이야기해주는 1919년의 이 흥미로운 위장결혼식 사건은, 60년 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계승된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암살되자,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11월10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최국민회의에서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한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한다. 유신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는 민주화운동세력은 11월24일, 서울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가장한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연세대 복학생인 민주청년협의회 홍성엽과 가상의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이 그것이다. 수백명의 하객들이 결혼식장을 메운 가운데 신랑입장과 동시에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는 함석헌 선생을 대회장으로 하여, 학계, 종교계, 운동단체, 문인들 등 재야가 모인 연합집회로, 참석자들은 강제해산, 연행되었다. 유신시대를 마감하는 역사의 한 기록에 남은 신부 이름 윤정민은, 그해 6월에 별세하신 윤형중 신부의 성(姓)과 '민주주의 정부'에서 앞 글자를 따온 것이라 흥미롭다.
결혼식을 가장해 독립을 주장하고 민주를 외쳐야 했던 역사를 사는 우리는 학생, 유생, 농민, 걸인, 기생 등 너나 할 것 없이 참여했던 민중의 3.1 만세운동 이후 세월이 10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도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여 고통받는 듯하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