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한국 스포츠의 아침은 서쪽에서 시작된다. 서쪽에서 신호탄이 쏘아올려지면 이곳 동쪽에서도 앞다퉈 소식 전하기에 바쁘다. 요즘 한국에 전해지는 해외 스포츠 소식들에 대한 단상이다. 미국과 유럽의 스포츠는 어느새 우리 틈에 깊숙이 들어온 또 하나의 스포츠 리그가 됐다.
국내 프로 스포츠 중 야구·축구·농구·배구를 묶어 '4대 스포츠'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분류도 재정립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미국 메이저리그와 유럽 각국의 축구리그 때문이다. 국내 팬들의 관심도로만 평가하자면 이들이 사실상 주인공이 아닐까. 현재의 '4대 스포츠' 분류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메이저리그와 유럽 축구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시대다. 미국 프로농구 NBA를 향한 팬들의 관심은 국내 프로농구 KBL을 앞선다. 외국 스포츠 콘텐츠가 국내 리그 콘텐츠보다 더 잘 팔린다는 게 업계의 냉정한 평가다. 스포츠 리뷰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국내 프로야구를 제외하면 유럽 축구나 NBA에 편중돼 있다.
아침엔 메이저리그와 NBA가 미디어를 수놓는다. 주말 저녁, 그리고 이따금씩 평일 새벽이면 유럽 축구가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쉰다. 요즘은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거나 TV중계를 볼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대부분의 외국 스포츠 중계를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음력 설을 쇠는 나라에서 차례를 지낸 뒤 음복 잔과 함께 미국 슈퍼볼 중계를 보는 시대다.
올해는 이러한 현상이 더 심화될 전망이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활약이 예상되는 한국인 선수만 7명이다. 거의 매일 나오는 타자, 사나흘에 한 번 나오지만 제일 카메라에 많이 잡히는 선발투수, 경기 막판 승부처에서 집중 조명받는 마무리 투수까지 포지션도 완벽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모 케이블 방송사가 아예 스포츠 채널 하나를 더 만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때문에 중계가 부족하다고 비판해온 프로축구 팬들은 김이 빠졌다. 그토록 프로축구 중계 확대를 위해 채널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는 무관심하더니 전혀 다른 이유로 채널이 뚝딱 하고 생겨버렸다. 이른바 비인기 종목, 즉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던 종목 관계자들과 팬들의 허탈감이 더욱 심한 이유다.
채널 설립으로 방송사는 가장 잘 팔리는 메이저리그 콘텐츠 전달을 위한 준비를 마친 셈이 됐다. 이제 일부 종목만 추종하는 열렬한 팬이 아닌 이상 인기 콘텐츠에 환호하며 호응하는 일만 남았다. 미디어는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콘텐츠를 생산한다. 대중은 다시 이를 소비하며 관심을 강화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결국 미국에서 날아오는 메이저리그 화면이 국내 스포츠 팬의 아침을 열게 됐다.
좋게 보면 스포츠의 '지구촌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의 '종속'이란 비유도 가능하다. 실제 전 세계인이 모두 미국 야구와 유럽 축구에 집중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만난 인도 기자는 "(인도에서는) 크리켓이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다. 그 외에는 국내 다른 종목들이 인기가 많다. 한국 사람들이 메이저리그와 유럽 축구를 스마트폰으로 보고 있는 걸 보면서 역시 많이 다르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유럽 유학생들에게 유럽 축구팀 이름을 대며 팬이라고 하면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들 관점에서 팬이란 보통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동네 팀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K리그 팀엔 관심 없어?"란 대답이 그들한테서 돌아온다.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만 보더라도 야구엔 크게 관심이 없다. 대신 그들은 자국 프로농구와 NBA에 열중하며 최근엔 아예 유럽에서 수준급의 선수를 자국 축구리그로 불러들이고 있다. 일본이 그나마 우리와 비슷하게 야구를 최고 인기스포츠로 평가하지만 자국 리그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짧디짧은 프로 스포츠 역사 속에서 순식간에 외국 스포츠 유입에 휩쓸린 우리와는 분명 다르다.
한국을 보면서 저 멀리 쿠바의 사정이 떠오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워낙 미국 망명자가 많은 쿠바지만 야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미국 땅으로 가는 선수들이 많다.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지난달 쿠바 대표팀으로 뛰었던 구리엘 형제가 잠적하는 등 여전히 이른바 '빅리그'를 향한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스포츠계의 현상만 놓고 보면 한국과 쿠바는 큰 차이가 없다. 어쩌다 국내 구장에 나타난 외국 스카우트들의 의중을 뒤쫓는 모습이나 국내 리그보단 어떻게든 외국 리그로 나가려 하는 선수들의 속내가 그 예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특정 장소를 떠나는 것을 뜻하는 '엑소더스'가 이따금 미디어 꼭지를 장식하는 것도 비슷하다.
미디어를 통한 해외 스포츠의 '간접경험'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편협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관중 혹은 시청자는 현지 카메라가 비추는 형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직접 그 종목을 해봤거나 전체를 조망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더욱 큰 영향을 받는다. 전체를 보지 않고 미디어가 제공하는 부분만 보는 것이다. 자연히 일부 스타의 화려한 플레이와 멋진 장면에만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극적인 장면과 중요 장면을 모아둔 하이라이트 필름만 머릿속에 남는다. 희생 정신 같은 스포츠 본연의 것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친구 혹은 가족과 경기장에 가는 설렘도 생락된다. 현장에서 잠시 일탈을 경험한 뒤 일상으로 돌아오는 그 찰나의 감정 같은 미묘함도 없어진다. 경기장의 열기와 관전 문화 역시 뒷전으로 밀린다.
혹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스포츠 세계화의 문이 열렸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스포츠 세계화의 이면을 보자. 국내의 경우 스포츠 세계화라기보다는 되려 스포츠 종속에 가까워 보인다. 충분한 애정과 시간을 들여 스포츠의 기반을 닦기 힘든 땅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유럽 축구 경기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방송국 관계자. 사진/유럽축구연맹(UEFA)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