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맛의 인문학)⑦화전(花煎)-하늘과 바람과 별과 꽃, 그리고 세상의 어머니들

입력 : 2016-03-23 오전 6:00:00
이제 시인은 이런 시를 써야 하겠다. 수소 하나에 꽃잎 하나, 헬륨 하나에 개화의 기적. 세상은 기적투성이이다. 산수유의 자그마한 노란 꽃잎 한 장이 몸을 펴는 데, 목련으ㅟ 몽오리가 움트는 데에 1억5000만km 떨어진 곳에서 수소의 분신이 있었다. 매순간 지구상의 모든 꽃잎보다 많은 수소가 헬륨으로 불타올라야 지구에서 부산한 개화와 식물의 수줍은 섹스가 가능했다.
 
누군가 꽃이 피는 이유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하겠다. 꽃이 피는 데 이유 같은 건 없다. 꽃은 피어야 하니까 피는 거라고. 흔히 사랑에 사랑 말고 다른 이유가 없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꽃이 피는 데 이유가 없지만, 꽃이 피는 시기는 대체로 특정된다. 봄이다. 꽃샘추위 속에서 막무가내로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개나리는 중2 아들을 닮았다. 추위를 잘 견뎌내어 무사히 화창한 봄날을 맞을 수 있기를 지켜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꽃은 봄의 전령사이고, 개화는 봄의 풍경이다. 꽃을 피우는 일은 제 3자인 우리 같은 인간에게나 풍경이지, 정작 봄에게는 사활적 과업이다. 개화에는 그래서 모종의 엄숙주의가 동원된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 <개화(開花)>에서 시인 이호우의 태도가 그렇다.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시인에게 개화는 개천(開天)이다. 한 하늘, 한 세상, 한 인생의 상징이다. 꽃의 호명(呼名)은 누군가에게 대자(對自)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며, 호명된 개화는 마침내 변증법적 승리로 또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달리 생각하면 개천의 개화는 미구에 폐천(蔽天)의 낙화일 수밖에 없어 승리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겠지만, 벚꽃의 가미카제에서 보듯 그럼에도 기꺼이 스러짐을 감수할 근원적 아름다움이다. <봄봄>에 피어있는 동백꽃마저 어쩌면 더 엄숙하게 존재의 필연성을 육화(肉化)하기에 개화는 형이상학적 제의(祭儀)로 간주될 수 있다.
 
개화는 형이상학적 의식
형이상학적 제의라는 설정은 하지만 꽃이 아닌 인간이 내린 것이다. 꽃의 사전적 정의는 식물에서 씨를 만들어 번식 기능을 수행하는 생식기관이다. 포유류의 생식기관에 비해 온건하고 더 납득할 만한 형태적 아름다움을 갖췄지만 그래도 생식기관이다. 개화는 그렇다면 섹스를 위한 발정이다. 주로 즐기기 위해 섹스를 하는 인간과 달리 식물의 섹스는 열매맺음을 목적으로 한, 한가로워 보이는 겉모양과 달리 절박한 기도(企圖)이다. 꽃을 보며, 개화를 보며, 벌 나비 어울리는 정경을 보며 흘러나올 음풍농월은 사실 섹스를 불모의 행위로 정형화한 인간사의 유락(遊樂)이다. 꽃이 개화나 수분에 전존재를 걸어야 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봄날은 꽃에게 형이상학적 시기임이 분명하고 그 날들의 행적은 존재론적 의식(儀式)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아무려나, 꽃의 발정과 섹스는 인간에 비해 더 간절하고 그리하여 외양은 물론 그 인식과 태도까지 더 아름답다.
 
잠시 눈을 높은 곳으로 돌려보자. 천문학의 관점에서 너무 가까운 별 태양 말고, 태양이 안 보이는 밤에 하늘을 우러르면 볼 수 있는 것들로 시선을 돌려보자. 밤하늘을 바라보면 바람 한 자락 너머에 별들이 있고, 그 별들이 시()처럼 반짝이는 광경은 봄날의 밤이 아니어도 언제나 주어져 있다. 별과 그 영원한 반짝임. 하지만 봄꽃이 만개한 즈음에 우러르는 밤하늘은 겨울밤과 달리 백화제방의 장엄한 꽃밭을 연상시킨다. 윤동주가 인 하늘은 아마도 겨울의 밤하늘이었을 테지만, 요즈음 봄밤에 대면하는 별밭은 꽃밭일 수밖에 없다.
 
꽃이 피는 데 이유 같은 건 없지만, 지구에서 꽃을 피게 하는 힘은 단 하나 태양이다.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의 특정 지점이 태양에너지를 잃었다가 다시 얻기 시작할 무렵에 식물은 발화(發花)한다.
꽃이 피는 데 이유가 없다면, 별이 빛나는 데도 이유가 없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별이 빛나는 데 빛나야 한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면 너무 힘 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발화와 마찬가지로 적어도 별의 발광(發光)에서는 동력을 찾아낼 수 있다.
 
다음은 천문학계에서 종종 인용되는 일화다. 독일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 한스 베테는 별의 발광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논문으로 발표하기 전 애인과 바닷가를 거닐었다. 애인이 별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자, 베테가 저 별이 왜 빛나는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뿐이야라고 으스댔다고 한다.
 
베테는 32살 때인 1939년에 <항성에서 에너지 생성(Energy Production in Star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에너지는 태양을 구성하는 물질인 수소의 핵융합을 통해 생겨난다. 두 개의 수소가 하나의 헬륨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방대한 에너지가 뿜어나오는 구조이다. 베터가 이 구조를 규명한 것이다. 물론 지구의 자연 환경에서는 핵융합이 일어나지 않는다. 핵융합에는 1억도 이상의 고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소 하나에 꽃잎 하나
이제 시인은 이런 시를 써야 하겠다. 수소 하나에 꽃잎 하나, 헬륨 하나에 개화의 기적.
 
세상은 기적투성이이다. 산수유의 자그마한 노란 꽃잎 한 장이 몸을 펴는 데, 목련의 몽오리가 움트는 데에 15000km 떨어진 곳에서 수소의 분신이 있었다. 매순간 지구상의 모든 꽃잎보다 많은 수소가 헬륨으로 불타올라야 지구에서 부산한 개화와 식물의 수줍은 섹스가 가능했다.
 
우리 조상은 그런 기적을 감지해서였을까, 봄날 꽃이 피는 즈음에 화전(花煎)놀이를 갔다.
화전은 찹쌀가루를 연하게 반죽하여 번철에 기름을 두른 후 반죽한 것을 얇게 펴놓고 그 위에 제철에 나는 꽃잎을 장식하여 지진 떡을 말한다. 꽃지지미 또는 꽃부꾸미라고도 한다. 굿상이나 제사상에서 편틀에 고임을 한 떡 위에 놓는 웃기떡으로도 사용된다. 보통 봄에는 진달래꽃으로 두견화전(杜鵑花煎)이나 배꽃으로 이화전(梨花煎)을 부친다.
 
우리나라에서 화전놀이는 신라시대에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경주에는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나오는데, 그 이름이 신라의 궁인(宮人)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유래하였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김유신의 맏딸 재매부인을 어느 골짜기에 묻고, 매년 봄에 같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열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화전놀이의 원형으로 읽힐 수 있다.
 
신라시대 화전놀이의 전통은 조선에도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조기를 보면 도성의 남녀들이 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매양 한 번 술자리를 베풀면 반드시 음악을 베풀고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큰 소리로 떠들면서 태평시대의 즐거운 일이라고 하였다. 귀가(貴家)의 부인들도 또한 많이 본받아서 장막을 크게 설치하고는 며느리들을 다 모아서 호세(豪勢)와 사치를 다투어 준비하는 것이 매우 극진하였다. 진달래꽃[杜鵑花]이 필 때에 더욱 자주 그러하니 전화음(煎花飮)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술과 함께 이웃들이 화전을 지져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경개 좋은 곳으로 화전놀이 나가던 행렬을 상상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무거운 번철을 지고 갔을 종놈이나, 음식재료와 술을 지고 갔을 종년을 생각하면 화전놀이라는 게 수소분신의 기적으로 치부하기엔 인간 땀이 먼저 떠오른다. 짝짓기 일념에 사로잡혀 <봄봄>의 점순이의 남자가 끊임없이 노동을 착취당하는 모습에서는 그래도 이른 바 해학이란 걸 발견할 수 있지만, 봄날 화사하게 꽃 핀 동산에서 벌어지는 화전놀이 구석에서 전을 부치는 종년의 모습에선 땀방울 말고 연상될 게 많지 않다.
 
어머니는 19살에 맏며느리로 종갓집에 시집을 갔다. 그 많은 일꾼과 식솔을 먹이느라 하루 종일 부엌에서 밥만 했다고 한다. 중풍에 누운 시할아버지의 대소변 수발을 그 꽃다운 나이에 다 해냈다. 요즘 같은 봄날에 날씨가 좋으면 시할아버지를 업고 둑 같은 데로 모시고 가 바람을 씌워 드렸다. 그렇게 20대의 10년을 시집살이를 하고 당시 시대상 그대로 이촌향도하여 서울에 자리를 잡고 모진 세월 자식들 키워내셨다. 한국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한국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은 그 시절의 삶 자체가 수소융합 못지않은 기적이다. 어머니에게 사치스런 화전놀이가 있었을 리 만무이고, 병수발 들며 친구처럼 친해진 늙은 시할아버지와 강둑에서 늘어진 버들가지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본 게 상춘의 전부였다.
 
그때의 시할아버지보다 더 늙어버린 어머니. 봄꽃보다 더 봄꽃 같았을 우리 어머니는, 할미꽃으로 꼬부라져, 이젠 아이도 없는 유모차에 의지하여 자꾸만 땅으로 굽는 허리를 억지로 곧추 세우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어느 봄날 꽃비 내리면 흔적 없이 가실 우리 엄마, 다투어 피는 저 꽃들처럼 그렇게 열심히 사셨다가 꽃들처럼 지실 테지. 세상의 모든 어머니처럼 내 어머니는 나에게 꽃이었고 별이었으며, 나의 유년은 따라서 엄마와 함께한 나만의 화전놀이로 기억될 게다. (참고 한국세시풍속사전)
 
 
삽화/김희헌
안치용 토마토CSR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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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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