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한국판 양적완화의 기본골격은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여 기업구조조정과 신성장산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고 주택담보대출의 만기를 20년 이상 장기화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논란이 격렬해지고 있는 이유는 정책의 목적과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사이에 합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의 목적만을 살펴보면 우리경제의 건전성과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 해결해야할 핵심적인 문제들을 조준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 지지부진한 기업구조조정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저성장 기조를 타개할 성장동력의 출현은 요원하기만 하다.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폭증하는 가계부채는 우리경제의 잠재적인 시한폭탄이 되어가고 있으며 안정화를 위한 대책이 시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제시된 수단은 의외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위험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한국판 양적완화가 정책적 수단으로 활용되기 어려운 이유는 정책의 실행이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과 정상적인 시장기능의 작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구조조정, 신성장사업 육성, 그리고 주택담보대출의 안정화를 위한 자금의 마련을 한국은행의 산금채 매입과 주택담보대출증권(MBS) 매입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은 국가부채 증가에 대한 부담을 전적으로 중앙은행에 부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가진 발권력은 정책입안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자금조달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재정정책 집행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효율적인 금융시장의 존립근간인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크다고 봐야 한다.
금융시장의 자금사정을 감안할 때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적절한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자금조달의 필요성으로 인해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이나 주택금융공사가 채권을 발행할 경우 굳이 한국은행이 매입하지 않더라도 채권시장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시중의 부동자금은 분류기준에 따라 다소 달라지기는 하지만 1000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자금중 일부는 부도위험없이 안정적인 금리가 지급되는 정책금융기관 발행채권으로의 유입이 충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험사나 연기금과 같은 대형 기관투자자들로부터 발생하는 장기채권에 대한 수요도 꾸준하기 때문에 산금채나 MBS의 발행확대가 금융시장의 자체적인 자금공급에 의해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시장참가자들이 많다.
어려운 경제현안을 시장이 아니라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기업구조조정이나 신성장사업의 육성에는 정책적 지원노력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부분은 시장기구에 의한 해결책의 모색일 것이다. 기업구조조정이 지나치게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책금융기관을 통한 구조조정보다는 PEF의 기능강화와 같은 시장친화적인 방법이 효율성 측면에서 더욱 우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신성장사업의 육성에 있어서도 크라우드펀딩이나 P2P대출과 같이 시장을 활용한 자금조달이 커질 수 있도록 유도하고 벤처캐피탈과 기술금융의 역할을 확대하여 장기적으로는 정책금융지원을 대체하도록 만들려는 노력이 오히려 더 필요할 것이다. 시장기구를 통한 해결은 지금 당장의 진행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지만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은 오히려 더 뛰어나기 때문에 궁극적인 문제해결의 방향성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해외의 경우 미국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대응과정에서 양적완화정책을 활용한 사실이 있으며, 현재에는 일본과 유럽이 경기부양을 위해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양적완화 정책에 대한 흔한 평가중의 하나가 잘 쓰면 극약처방이 될 수 있지만, 잘못 쓰면 그냥 극약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판 양적완화 주장은 이 둘 중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전자도 후자도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 주장이 경제학적 색채보다는 정치적 색채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