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총선 결과 중 고무적인 사실 하나는 대한민국의 고질병이던 지역주의에 작지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현상이 지속·확장되기를 바라는 심정은 아마도 많은 국민들에게 공통된 것이리라. 20, 30대의 투표율이―물론 70%까지 가기에는 아직 먼 길이나―지난 19대보다 높아진 것도 기쁜 일이다. 내일이면 56주년이 되는 4·19혁명. 당시 주축을 이루었던 성숙하고 용감한 고교생들, 전국에서 떨쳐 일어났던 그들은 이제 70대 유권자가 되어 세월만큼 강산의 변화만큼 의식도 많이 변화했겠지만, 1960년의 4·19정신은 여전히 역사로 살아 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 대구 수성천 바닥에서 / 야당 부통령후보 유세강연이 벌어졌다 / 경북교육위원회는 / 자유당의 지시로 / 일요일 학생 등교를 강행했다 / 학생들이 / 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 학생들이 화났다 / 경북사대부고 / 경북고 / 대구고/ 대구상고 / 경북여고 학생 / 천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 학원의 자유를 달라! /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 이런 구호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나아갔다 / … // 3일 전 경북고 학생회 부회장 이대우가 / 대의원회를 소집했다 / 다음날 / 다시 소집했다 / 대구고교 손진흥 / 사대부고 최용호 / 다른 고교에도 알렸다 // 이대우와 / 손진흥 / 최용호 / 함께 자면서 / 내일 감옥 철창에서 만나자 했다 / 그리고 한밤중 낮게 낮게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불렀다 // 다음날 정오 / 그들은 각자의 학교에서 외쳤다 / 오늘 우리는 궐기한다! // 그리하여 / 도청 광장이 가득 찼다 / 다섯 고교 남녀학생 가득 찼다"('이대우', 21권).
이렇듯 4·19로 연결되는 학생들의 시위는 대구에서 처음 시작됐다. 당시 대구는 '보수적'인 도시가 아니라, 1946년 식량난으로 인한 생존권 확보와 식민잔재 청산을 위해 미군정에 대항하여 10월 민중봉기가 일어났던 항쟁의 도시였다. 2·28 대구학생의거 이후, 알려진 바와 같이 3·15 부정선거가 마산의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4월 11일 홍합 낚시를 하던 '어부 김기돈'(22권)이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힌 마산상고 김주열 군의 시체를 바다에서 끌어올림으로써 "3월의거가 / 4월의거로 불붙었”고 “하나의 죽음이 / 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김주열', 21권). 고교생들의 시위는 전국 곳곳으로 확산됐다. 반면, 대학생들의 최초 시위는 4월4일 전북대에서 있었고 이후, 4월19일 고등학생 연합시위가 예정돼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대생들이 18일에 먼저 시위행진을 벌이게 된다. 이날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은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반공청년단 깡패들의 피습을 받는다('임화수들', 21권). 4월19일 경찰의 무차별적 발포는 전 국민적 저항을 야기하고 마침내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로 사태가 종결된다. 그러나 이는 '미완의 혁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소년·소녀들
3·15의거, 4·19혁명에서 학생들 곁을 지킨 시민들 속에는 "마포중학 졸업하자 / 농기계공장 직공이" 된 "외아들 동남 효덕이"('효덕이', 22권)나 "목포 덕인중학 나와" "염리동 이북사람 철공소에 들어"간 완도 출신 이채섭('이채섭', 21권) 같은 어린 노동자들도 있었고, "열다섯살에 구두닦이 심부름꾼이" 돼 "저금통장 남기고 총 맞아 쓰러"진 오성원('오성원', 21권) 같은 구두닦이 소년들도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대학생들 옆에는 중학생들, 심지어 '국민학생'들도 있었다. "수송국민학교 6학년 전한승 / 4월 19일 광화문거리 / 경찰 발포 / 네가 쓰러졌다 / 수송국민학교 6학년 전한승 // 네 글씨는 늘 컸다 / 다 쓰지 않은 공책 / 국어공책 / 지리공책에도 / 빈 곳이 컹컹 소리내며 남아 있다 // 4월 26일 / 10만명의 데모에 / 수송국민학교 어린이들도 참가했다 // 국군아저씨들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 이런 플래카드를 든 어린이 데모가 나타났다 // 어른들의 데모 / 대학생들 / 고교생들의 데모가 그 어린 데모에게 길 비켜주었다 // … // 전한승의 어머니는 오직 전한승만을 기억하고 / 모든 기억이 없어졌다 / 오직 전한승의 책과 공책 / 전한승의 밥그릇 / 전한승의 옷만 기억하고 / 다른 기억은 없다 // … / 백일 때때옷 / 네살 때 옷 / 미운 일곱살 때 옷 열살 때 옷 / 네 까까모자 귀마개도 두었다 / 어림없다 다 태워버리라 하지만 어림없다"('전한승', 23권).
4.19민주묘지 모습. 사진/뉴시스
한편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쓰러져간 중학생 소녀도 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 열네살 소녀는 이 유서를 남기고 / 미아리고개 시위에 참가 /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한성여중 진영숙', 21권). 실로 가슴 아픈 의젓함이다.
혁명에 잊혀진 사람들·혁명을 배반한 사람들
4·19세대의 혹자는 자부심과 함께 변절했고 혹자는 자부심과 함께 부끄러워하며 이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혹자는 그저 잊혀졌다. "이유순 // 4월혁명 한 가녘에 나섰던 처녀 고요한 처녀 // 서울 을지로 2가에서 /경찰 곤봉 맞고 / 경찰 총탄 맞았다 / 그녀의 허리 / 그녀의 좌측 좌골이 거덜났다 // 일어날 수 없다 / 일어설 수 없다 / 누워서 / 밥 먹고 / 누워서 오줌 눈다 똥 싼다 // 그 말없는 얼굴에도 / 이따금 웃음 보였다 // 평생 누워 있다 // 나무들은 평생 서 있고 / 나는 평생 누워 있다고 / 찾아온 친구에게 / 그녀가 말한 적 있다 / 그뒤로 / 그런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 수천개의 하루가 오고 또 왔다 / 혁명도 곧 거덜나 검은 안경 쓴 쿠데타의 시대가 왔다 / … / 텅 빈 가슴 / 고요하고 고요하다"('평생 침대', 21권). 4·19혁명의 시위과정에서 부상당한 사람의 수는 공식적으로 6259명이라 한다. 공식 통계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한다면 그 숫자는 아마 더욱 커질 것이다. 평생 누워 있어야 하는 사람이 어찌 이 처녀뿐이겠는가.
진달래 꽃사태로 스러져간 젊은 목숨들이 얻어낸 민주주의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혁명은 너무 빨리 배반당했다. "1960년 5월 / 그 총탄 퍼붓던 거리 / 그 곤봉 날뛰던 거리 / 그 피의 거리에 신록이 왔다 // … // 그 시위의 거리 / 이제는 아무나 걸어가는 거리로 돌아왔다 / 언제 이 거리가 / 계엄령의 거리였던가 / 죽음의 거리였던가 / 혁명의 거리였던가 // 아무나 오가는 일상이야말로 최고의 삶 // 그 태평로와 세종로 / 택시 몇대 / 관청 지프 몇대가 지나가고 있다 / 그 가운데 으리번쩍 쎄단차가 지나가고 있다 // 4월 18일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 고려대 반독재선언문 읽던 학생 / 그가 타고 있었다 / 옆자리에 어여쁜 여비서가 타고 있었다 / 신촌의 여자대학생 // 학생혁명은 혁명 직후 / 이렇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 거리의 학생들 / 더이상 강의실은 시시했다 / 더이상 지식은 시시했다 / 어느새 시대의 주역 / 뻥튀겨진 / 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 … // 반독재선언문 낭독한 학생 / 행정학과 이긍철 / 그는 쎄단차에 타고 지나가고 있다 / 자유당 간부가 지나갔듯이 / 과도정부 장관이 지나가듯이"('쎄단', 23권).
4·19 당시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의 역할도 컸으나, 그리고 물론 시민들의 지지가 결합됐기에 이승만 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었겠으나, 대구의 2·28시위부터 시작해 대전, 마산, 부산, 인천, 성남, 춘천, 광주, 청주, 충주, 서울 등 <만인보>에서도 드러나듯이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살해당한 김주열 군이 같은 고등학생이었다는 점, 당시 대학생은 소수였고 서울에 편중돼 있었다는 점, 또한 고등학생들의 사회인식이나 의식 수준이 성숙했다는 점 외에도 "수많은 관제데모에서 데모를 배워"온 그들이 "이제 누구의 명령이 아니라 / 자신들의 명령으로 데모를" 하려 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손진흥', 21권). "관제시위 어용시위에 길들여진 소학생들 중학생들"('고교생들', 21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니 일종의 역설인 셈이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