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장소가 매력적인 것은 시간의 흐름과 인간사의 자취를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매력은 때로, 가슴 저린 고통을 동반하는 끌림이기도 하고,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의 저장소이기도 하다.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 젊은이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된 대학로의 한 다방은 1956년 문을 연 이래 60~70년대 문인, 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모임 장소로 역사의 굴곡들을 지켜보아왔다. 오늘로 이어지는 어제의 현실이 흑백사진을 뚫고 생생히 살아나오는 듯하다.
'서울역 회군'과 정파 투쟁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던 대학생 시위대가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 10만명 가량 모이자, 학생지도부는 대처 방안을 결정하는 데 혼란을 겪게 된다. 투쟁의 지속과 퇴각이라는 이견이 생기고 논쟁 끝에 결국 '군 출동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시위대는 해산하게 되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다. 그러나 이 퇴각 이후 5·17 계엄확대와 5·18 광주학살이 뒤따르자, 서울역 회군의 '전술적 과오'에 대한 책임 논쟁과 향후 전술에 대한 이론투쟁이 격렬해진다.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서울역 회군을 이끈 그룹이 서울대 서클 '한국사회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무림(霧林)진영이고, 이를 비판하던 그룹이 각 대학 내 '흥사단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학림(學林)진영이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이 이른바 '무학논쟁'인데, 무림의 입장이 준비론에 가깝다면 학림의 입장은 투쟁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울대 비공개 운동서클들의 대표들이 모여 학생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논의하던 언더(under) 조직은 무림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학생세력을 민중운동의 '주도체'로 간주해 근로대중의 의식화·조직화에 주력해야 하고 불필요한 시위를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학림진영은 학생세력이 민중운동의 '주도체'가 아니라 '선도체'일 뿐으로, 학생운동은 정치투쟁을 통해 민중항쟁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전까지는 무림의 영향력이 막강했으나, 광주항쟁 이후 학림노선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언더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무림측은 시위를 계획하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4인조 시위팀을 꾸리고 자신들의 입장과 투쟁의 방향성을 밝히는 선언문을 1980년 12월11일에 발표한다.
무림사건, 학림사건 그리고 부림사건
이 작은 시위는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고문에 못 이겨 쏟아져 나온 이름들에 대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를 불러와 결국 무림진영을 궤멸시키고 만다. 안개 속에 있는 조직사건이라는 뜻에서 경찰이 '무림(霧林)사건'이라 명명한 이 일로 인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은 학림진영으로 넘어가게 된다. 학림은 1981년 2월27일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을 결성하고 1981년 봄부터 대학가의 시위들을 주도한다. 1981년 6월 이태복, 이선근 등 전민학련 관련자 수십여명이 연행되고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과 함께 '반국가단체' 혐의를 덮어쓰게 된다. 전민학련이 학림다방에서 회합을 가졌기 때문에 이것은 '학림사건'으로 불리게 되는데 무림사건과 마찬가지로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점철된 사건이었다. 학림사건 피해자들은 2012년 6월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았다.
동일한 방식으로, 불법감금과 고문에 의해 학림사건을 부산에서 재현한 것이 부림사건이다. 1981년 9월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이 반국가단체 활동을 한 공안사범으로 기소되었다. 부산지역의 인권변호사이던 김광일이 검찰의 압력으로 사건을 맡지 못하게 되자 다른 변호사들에게 변론을 부탁하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노무현 변호사이다. 그리고―잘 알려진 바와 같이―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삶의 행로가 바뀌게 된다. <만인보>가 그리는 김광일, 노무현 변호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중반 이래 / 부산에 가면 / 거기 김광일 변호사 있다 / 노무현 변호사 있다 // 널찍널찍한 마당 같은 얼굴에 / 아귀찜 같은 웃음 / 하지만 때로는 요령소리 내어 / 새벽잠 깨기도 한다 // 무릇 과격한 사람까지도 / 비겁한 사람까지도 / 받아들일 때는 영락없이 통 큰 무당이라 //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 저 건너 영도가 / 다 그의 땅인가 / …"('김광일', 12권).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 사법고시도 마친 뒤 //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 슬픔 있는 곳 / 아픔 있는 곳 /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 푸우 물 뿜어대며 // … / 부산항 일대 / 인권의 등대가 되어 / 그 등대에는 / 마치 그가 없는 듯이 / 무간수 등대 / 오직 힘찬 불빛 어리석었다 // 어디 그뿐이던가 / 사람들 으리으리 광내는데 /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 헛소리마저 판치는 / 텐트 밑에서 /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 아무래도 분노 같은 진실 때문에 / 그대 대한민국의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 속으로 / 속으로 격렬한 / 누가 몰라주는 진실 때문에"('노무현', 13권).
몇 가지 단상들
시 '노무현'이 실린 <만인보> 13권은 1997년에 출판되었으니, 노 전 대통령이 7년 전 오늘, 2009년 비운의 삶을 마감하기 10여년 전에 쓰인 셈이다. 위의 시는 이 연재의 첫 회에서 말한바와 같이 2010년 완간개정판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1997년에 출판된 시와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역사정보를 정정하거나 시구를 다듬느라 <만인보> 초판과 완간개정판의 시들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는데(이는 개작을 자주 하는 고은 시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2010에 실린 시 '노무현'에서 변화된 구절은 시의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여서인지 미세하게 덧실은 시인의 소회가 느껴진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를 아흐레 앞둔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토크콘서트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에 참석한 시민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예를 들어, 초판본의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 힘찬 불빛으로"(1997)는 "무간수 등대 / 오직 힘찬 불빛 어리석었다"(2010)로, "아무래도 그는 분노 같은 진실 때문에 / 대한민국의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1997)는 "아무래도 분노 같은 진실 때문에 / 그대 대한민국의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2010)로, "속으로 / 속으로 격렬한 / 진실 때문에"(1997)는 "속으로 / 속으로 격렬한 / 누가 몰라주는 진실 때문에"(2010)로 바뀌었다. 수정된 시구에서 고인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고은 시인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은 필자의 개인적 소감일 수도 있겠으나, <만인보>의 저자가 이미 초판본이 나오던 1997년에, 즉 고인이 대통령이 되기 여러 해 전에 "아무래도 그는 분노 같은 진실 때문에 / 대한민국의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고 예측한 것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또한, 고은 시인은 죽 "그"라는 3인칭으로 묘사하던 주인공을 개정판의 마지막에 가서 "그대"로 바꿈으로써 떠난 이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있다.
세월 속에 강산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과거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로,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거듭나고 정치인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김광일 변호사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열 가지 이유'라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경계하는 사이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것이다. 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이라크 파병을 감행한 것은 많은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고문기술자들이 사과 한 마디 없이 잘 살고 있고 광주학살을 지시한 자들이 평화롭게 사는 현실 속에서 "분노 같은 진실"을 품었던 한 전직 대통령만을 희화화하는 집단이 존재하는 것도 씁쓸하다.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은 2014년 2월 마침내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득 무림, 학림, 부림이라는 명칭들이 갖는 역사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학림다방의 '학림'이라는 이름은 1975년까지 동숭동에 있었던 서울대 문리대의 축제 '학림제(學林祭)'로부터 따온 것일진대, 축제가 고문으로 바뀌는 시절에 청춘을 보내야했던 젊은이들은 이제 그만한 또래의 자식을 둔 부모가 되었다. 그들의 사고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