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18화)“마음 밖에 법 없거늘”

법을 구하러 떠난 승려들

입력 : 2016-05-09 오전 6:00:00
불기 2560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행렬이 토요일 저녁 서울의 중심가를 수놓았다. 연등회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경문왕 6년(866) 그리고 진성여왕 4년(890)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로 행차하여 등을 구경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정월 보름 혹은 이월 보름에 국가의례로 연등회가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사월 초파일 연등도 있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등회의 축제마당에는 미얀마 스님들과 국민들도 동참했는데, 그들을 보며 문득 구법(求法)을 위해 먼 나라로 떠났던 신라의 승려들을 떠올리게 된다.
 
중국 불교 유식학에 기여한 원측(圓測·613-696)
  
8년 전 인도의 티베트 사원에서 만난 티베트 스님으로부터 그들이 보살로 존경해 온, 그리고 오랫동안 중국의 승려로 알고 있던 한 뛰어난 고승이 실은 한국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스님이 고승의 이름을 티베트식으로 불러 누구인지 확실치는 않았으나, 아마도 교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원측스님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원측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가 법성(法成·Chos grub)에 의해 티베트어로 번역돼 티베트 불교의 유식학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후에 한문본의 10권이 산실됐지만, 다행히 티베트어본 전문이 둔황 유적지에서 일본인 학자 이네바 쇼오쥬(稻葉正就)에 의해 발견돼 1972년에 한문본으로 복원됐다. 원측의 <해심밀경소>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신라 고승의 3대 저작물로 손꼽힌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에서 조계사까지 이어진 연등행렬 모습. 사진/뉴시스
 
<만인보>는 원측의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원측(圓測)이 지은 바 / 시 한편 나와 있다 // 마음이 일어날 때 / 온갖 법이 생겨나더니 / 마음이 사라지니 / 무덤과 움집이 둘 아니네그려 /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 만법은 오직 의식이니 / 마음 밖에 법 없거늘 / 어찌 따로 구하리 // 카아 // 서라벌 왕손으로 태어나 / 대궐도 / 종친부도 다 내버려야 했으니 / 세살 때 / 달랑 절에 맡겨졌다 / 자칫 왕손의 목숨 / 위태위태할 때 / 절에 들어가 / 목숨 진득이 보전하였다"('원측', 25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측의 시는 사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나오는 원효대사(617-686)의 오도(悟道)설화이다. 그 내용이 유식론(唯識論)이다보니 유식학의 대가인 원측의 것으로 잘못 묘사된 듯하다. 원측과 동시대인인 원효는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고자 의상과 함께 두 번 유학길에 오르는데, 첫번째(650년)는 압록강 근처에서 국경을 경비하는 고구려군에게 잡혀 실패하고 두번째(661년) 시도 때 흙굴(움집)과 무덤에서 자다가 깨달은 것이 앞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원효가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당 유학을 시도하다가 그것이 불필요함을 깨닫고 신라에 남아 대중교화와 교학연구에 몰두한 반면, 원측은 15세에 당으로 건너가 현장을 만나게 된다. <만인보>의 시에서처럼, 원측은 보통 경주 모량부 출신의 신라 왕족으로 간주되는데, 학자에 따라 모량부는 맞지만 왕족이 아니라 6두품 출신이라는 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왕족이면 왕권다툼의 위협을 피해서, 6두품이면 골품제의 폐단인 차별을 피해서 일찍 출가하고 일찍 당으로 건너가 영영 못 돌아온(혹은 안 돌아온) 경우였으리라. 어쨌든 15세에 당나라로 간 원측은 "이 경 저 경 배우다가 / 유식학을 만났다 / 어학을 만났다 / 중국어 티베트어 범어 등 / 6개 국어에 두루 밝았다 // 현장이 지고 온 인도 불전을 / 원측이 다 해독 / 주석서를 쓰고 썼다 // 신라 신문왕이 돌아오라는 / 간곡한 분부였건만 / 측천무후가 못 돌아가게 / 붙잡아놓고 / 부처로 보살로 섬기니 / 웬놈의 모함 / 측천무후의 사내 노릇이라고 // 1천 5백년 뒤 / 중국 서안 / 그 당시의 장안에 가보았더니 / 거기 / 현장 / 규기와 함께 / 원측 / 세 분의 사리탑이 나란히 서 있더라 / 서안 흥교사 마당 / 원측의 사리탑이 입을 열더라 // 너희들 여기 뭘하러 왔노? / 놀러 왔노?"('원측', 25권).
  
현장의 신유식(유상유식)을 계승해 구유식(무상유식)을 비판하고 대승불교철학의 다른 한 산맥인 중관(中觀)사상과 대립한 자은사의 규기 일파는 법상종의 정통파를 자처하며 원측의 유식학을 이단으로 맹비난한다. 심지어 현장이 규기에게 강의하는 것을 원측이 도청해 먼저 발표했다는 날조까지 하게 된다. 이 지면에서 원측의 깊은 사상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그가 구유식과 신유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화합을 꾀하고 유식학과 중관학의 사상적 대립을 지양해 유식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 많은 경전 주석서들의 집필과 강의를 통해 '서명학파'라 불리는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들을 통해 신라에도 유식사상을 전파했다는 점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불교에 대한 원측의 공헌도는 그의 사후 '사리탑명병서(舍利塔銘幷序)'에 적혀 있다. "서명사의 대덕으로 부름을 받고서 <성유식론소> 10권, <해심밀경소> 10권, <인왕경소> 3권, <강반야관소연론>, <반야심경>, <무량의경> 등의 소를 찬술하였으며, 현장법사의 신비로운 전적을 도와 당시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었다. 현장을 도와서 불법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무궁한 교법을 크게 일으키신 분이다."
 
티베트 불교의 선구자 무상(無相·680-756 혹은 684-762)
  
신라 때 많은 승려들이 선진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이나 인도로 떠났는데 이러한 유학생 선조들을 법을 구하러 신라의 서쪽으로 갔다고 하여 '서학(西學) 구법승'이라 칭했다. 물론 의상처럼 당에서 신라로 돌아온 경우도 많지만, 혜초처럼 인도에서 당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생을 마치거나 아예 인도에서 돌아오지 못한 경우 혹은 당에서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최치원은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에서 중국에 유학한 신라 승려들을 '서화(西化)'한 사람과 '동귀(東歸)'한 사람으로 나눴는데, 서화자는 구법승 가운데 원측, 무상과 같이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서쪽 당나라에서 입적한 승려를 뜻하고 동귀자는 유학 후 동쪽 신라로 돌아온 승려를 가리킨다. 
  
무상스님은 728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입적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선사상과 두타행으로 사천지방에서 선종의 기반을 닦은 신라 왕족 출신의 승려다. 그는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돈황 막고굴의 한 석실에서 / 그 이름이 살아나왔다 / 1천 2백년 지나서야 / 그 이름이 살아나왔다 // 낯선 무상(無相) // 신라 성덕왕 아들이던 / 무상 / 일찍이 왕권 다툼 궁궐 떠나 / 중국으로 건너간 / 무상 // 세상 떠나자 / 보살로 존자로 추앙받은 오백나한 / 455번째 나한으로 추대된 / 무상 // 처음으로 / 저 티베트에 들어가 / 선을 가르친 / 무상 // 그 산소 희박의 라싸에 들어가 / 할죽할죽 숨 익혀 / 그곳 라마 선객들의 스승이 된 / 무상 // 마조도일(馬祖道一)이 / 남악의 제자가 아니라 / 무상의 제자라는 것 / 뒤에야 알려지니 // 동방 구산선문 마조도일의 법맥이야 / 본디 무상의 법맥 아니던가"('무상', 25권).
  
무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이견들이 존재하는데, 그가 신라왕의 아들이었든, 왕족이었든, 진골귀족이었든, 당시 신라 왕실 내 정치세력들 간의 투쟁의 희생물이 된 것은 맞는 듯하다. 늦은 나이에 당으로 건너가 승려로서 수행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본국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송고승전>(권19) '무상전'에 의하면, 무상이 성도 정중사에 머물고 있을 때 신라에서 새로 왕이 된 그의 동생이―친동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무상이 돌아오면 자신의 왕위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해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나, 돌아오고 싶어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신라의 '서화 구법승'들은 그러나 타국에서 끊임없는 정진으로 교학에서나 선(禪)에서 크나큰 기여를 하였으니, 현재 한국 불교의 종단들과 승려들이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한번쯤 자성의 시간을 가질 만하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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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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