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럽다. 그게 나다

입력 : 2016-06-10 오전 10:57:08
초등학교 시절, 또래 남자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기 위한 대화 주제는 축구와 온라인 게임 크게 두 가지였다. 날때부터 운동엔 소질이 없던 터라 게임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화려한 영상미와 매력 넘치는 게임 속 캐릭터들은 어린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며칠을 그렇게 사로잡혀 있었을까. 드디어 친구들이 게임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내심 뿌듯했다. 드디어 내 캐릭터가 활약하는 날이 오는구나. 그러나 캐릭터를 본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내 캐릭터에게 잡캐, 즉 게이머들 사이에서 공식화된 성장 절차를 밟지 않은 ‘잡스러운 캐릭터’라는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아직까지 생각난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목적은 재미가 아니었던가? 내 나름대로 게임을 즐기며 때로는 기분 내키는 대로 캐릭터를 성장시켜 왔을 뿐인데, 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잉여 취급이라니.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룰을 따르지 않으면 캐릭터는 강해질 수 없을 것이고 나 역시 게임을 매개체로 아이들과 어울리기는 계속 어려워질게 뻔했으니까. 결국 게임의 제 1 목적은 사라졌다. 이제는 뒤쳐지지 않기위해, 더 강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게임을 해야했고 공략집에 나오지 않은 사소한 요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이제는 술잔을 기울일 때도 공채와 자격증 이야기 뿐이고, 취업에 성공한 여자 동기의 직장 생활 푸념을 듣다보면 그마저도 부럽다는 생각만 가득한 시점이다. 동기는 지나고보니 취업문이 그렇게까지 좁진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스펙을 갖추기 위해 이 친구가 1학년때부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그날 밤 서로 부딪혔던 술잔은 누군가에겐 취업 축하주였지만, 내게는 이제 좀 정신 차리라는 쓴 맛 나는 각성제로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서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을 너무 잘 들어서일까. 크게 사고를 친 적도, 그렇다고 취업 필수요소라는 ‘나만의 스토리’라고 내세울 만한 경험도 없이 무난하게 자라온 내 삶이 무향무미의 청포묵 같았다. 남들은 일찌감치 결승선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어디로 달릴지도 정하지 못한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꼴이라니. 남들만큼 달릴 수 있을지, 아니 그전에 방향을 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밤샌 고민 끝에 스스로에게 붙인 딱지표는 ‘잡캐’였다. 모난 구석 하나 없지만 남들처럼 효율적이지도 않고 하고자 하는 바도 모호한 지금의 내 모습이 십여 년 전 게임 속 캐릭터와 닮아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세상은 재미 만으론 살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과, 서점을 뒤져보아도 인생 공략집 같은 건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좁은 문을 통과하려고 달려갈 때,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사진/플리커
 
숱한 강연에서 들었던 ‘내가 잘하는 일을 찾아 그 일에 미쳐라’ 류의 말도 수박 겉핥기처럼 느껴졌다. 강단에 서 있는 저 분들의 노력이야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부분이지만, 본인의 재능과 적성을 일찌감치 발견하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까. 좁다는 취업문을 두드려 보려고 해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취업 패키지들과 취업준비생 전용 인터넷 카페에서 스크랩한 정보를 보고 전체 취업준비생 들 중에 내 위치가 어디쯤 되는지 헤아려 보는 일이었다. 차트를 훑는 손가락이 밑으로 향할수록 지난 날의 ‘잡캐’가 느끼던 당혹감이 되살아났다. 결국 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아파하는’청춘도 되지 못한 채 ‘멍때리는’ 청춘이 되고 말았다.
 
한참을 그렇게 멍때리며 다시 고민해 보았다.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순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성공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늘 아래 몸 뉘일만한 집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그러나 이 땅의 수많은  ‘N포세대’들이 보여주듯, 현실에선 그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지불해야 하는 댓가는 결코 소박하지 않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그 댓가를 위한 레이스에 언젠간 나도 합류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기왕 남들보다 한 발 늦어버린 일, 조금만 더 나 답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온갖 사람을 만나보고, 온갖 책을 뒤적여보고, 온갖 일들에 오지랖을 펼쳐보기. 여전히 매뉴얼과는 동떨어진 삶이지만 초등학생때부터 이어져온 천성을 쉽게 버릴 순 없는 일이다. 결국 한번 더 잡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세간의 가혹한 비난이 예상되니 이렇게 반격하기로 마음먹었다. ‘퀘스트 다 생략하고 엔딩 보겠다고 죽어라 달리면, 엔딩 본 다음엔 어쩌게?’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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