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일부터 26일까지 서울 동숭동에서는 '원로연극제'가 열리고 있다. 한국 연극계의 원로 극작가와 연출가 4인(오태석, 하유상, 김정옥, 천승세)의 작품들이 무대에 오른 것인데, 70~80대 후반인 이들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한국 현대극의 역사를 만나게 되는 감흥이 있다. 또한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게 되는 즐거움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하유상 작가의 <딸들의 연인>이 그러하다. 작가가 쓴 애초의 제명이 <딸들의 연애>였던 이 작품은 1957년 <딸들은 연애자유를 구가하다>라는 제목으로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1950년대의 연애결혼 문제가 2016년의 젊은 관객들을 흥미로운 시간여행으로 이끌고 있다.
근대식 극장들 그리고 '토월회'
한국 최초의 실내 상설극장으로 일컬어지는 협률사(協律社)는 1902년 고종황제의 등극 40년 경축행사를 위해 설립된 일종의 황실극장이었으나 1906년 4월에 폐지되고, 1907년 12월에 관인구락부, 1908년 7월에 원각사로 계승되어 연극상연장이 된다. 구연극도 공연하였으나 한국 최초의 '신연극장'이자 근대식 국립극장인 원각사(圓覺社)는 친일세력 상류층의 사교장이기도 했다. 이 곳은 또한 이인직의 신소설을 각색한 신연극 <은세계(銀世界)>가 공연된 곳이기도 하다.
고종 40주년 기념행사장 마련을 위해 1902년 서울 정동 야주현에 세운 최초의 극장 협률사 단원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그러나 사실, 서울의 협률사보다 먼저, 1895년 인천에 신식극장인 협률사가 부산 출신의 이주 상인 정치국에 의해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 인천의 협률사는 이후 '축항사(築港舍)'로, 그리고 다시 영화관 '애관(愛館)'으로 바뀌었다. 애관은 처음에 연극을 주로 공연하던 공간이었지만, 1920년대 중반 활동사진(영화) 상설관으로 거듭났고 2004년 멀티플렉스로 모습을 바꾸어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온 역사적인 장소이다. 애관에서 토월회 공연이 개최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토월회는 1923년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연극 공연 단체로, 한국 신극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뜻이 토(土) / 이상을 좇는다는 뜻이 월(月) // 1923년 일본 동경 유학생의 토월회가 결성된다 / 박승희 / 김복진 / 김기진 형제 / 이서구 / 김을한 / 박승목 등 // 다 전공 따로 // 무대예술 지망 / 조각 / 문학 / 미학 / 영문학 / 의학 전공의 젊은이들 // 거기에 객원회원 김명순은 / 시 지망생 // 1923년 9월 18일 조선극장 / 첫 실패에 흩어지지 않고 / 제2회 공연 똘스또이 「부활」이 대성공 // 카추샤 역 이월화 / 네플류도프 역 안석주 / 연극이 끝나면 연극의 연장으로 / 남산에 올라 경성을 내려다보는 주인공이었다 / …"('토월회', 20권).
단성사와 연쇄극(kino-drama)
광복 전까지 유일한 연극전문극장으로 1930~1940년대 대중극의 중심지가 된 곳은 1935년에 건설된 동양극장이었다. 동양극장은 일반연극의 정춘좌, 사극 중심의 동극좌, 희극 중심의 희극좌 등 전속극단을 두고 단원들에게 월급제를 실시하였다. 1937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신파극이 대성공을 거두는 등 상업연극의 중심지였으나, 1939년 재정악화로 주인이 바뀌고 1945년 해방 후 사회변화와 함께 동양극장의 전속단체들도 해산을 겪게 된다. 과거의 영화(榮華)를 뒤로 한 채 대관극장이 되었다가 끝내 사라지고 만 동양극장의 자취가 연극사에 남아 있다면, 현재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는 단성사의 운명이 안타까운 것은 영화사에 남긴 그것의 족적 때문이리라.
동대문 전차차고 근처에 설치되었던 동대문 활동사진소(1898년 개설, 1907년부터는 광무대로 바뀜)는 전차 이용 승객을 늘리기 위해 활동사진을 활용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한국 최초의 영화전문극장이었다면, 단성사(1907년)는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었다. 한국 최초의 연쇄 활동사진극인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1919년)를 비롯해, 극장 촬영부가 직접 제작한 극영화 <장화와 홍련>(1924년), 그리고 그 유명한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이 모두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다. 신파극단 <신극좌>의 김도산(1891~1921)이 각본·감독·주연을 맡고 당시 단성사 경영주였던 박승필이 제작을 지원해 만든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10월27일은 후에 '영화의 날'로 지정되었다.
"뜻있는 남녀들아 / 종로 단성사에 가보시라 / 단성사 무대 막이 오르면 / 연극 「일편단심」 공연이라 / 그 연극도 보고 / 활동사진도 보시라 / 일러 연쇄극 / 연극과 활동사진 연쇄공연이라 // 서울 장안의 명소 사진으로 찍어 / 연극 막간에 상영하니 / 요정 명월관 / 청량리 솔밭 / 장충단 돌다리 / 한강철교 / 저 제물포 증기선과 황포돛배도 보시라 // 거기 단성사 / 2층 떠받치는 / 1층 기둥 옆좌석 / 거기 반드시 나타나는 박승필 / 백단화 멋져 / 껌정 구레나룻 멋져 / 칠피구두 / 멜빵 달린 바지 / 시곗줄 내린 세이꼬 회중시계 멋져 // 기생도 / 배우도 / 대담무쌍으로 / 양반집 규수께서도 나와보시라 / 어찌 장안의 도련님들 / 난봉꾼들 모여들지 않을 터이뇨 // 연쇄극 뒤에는 / 으레 또 하나의 연쇄극 이어지렷다 // 저만치 단성사 밖 / 봉익정 골목 어귀 / 인력거 두 대 대기하렷다 / 하나에는 반드시 박승필 / 하나에는 박승필 상대할 여자렷다 // 일편단심 보았으면 / 일편단심 잊으렷다 / …"('단성사', 27권).
광무대를 인수해 구극 전용극장으로 운용했던 박승필(1875~1932)은 1918년 단성사를 인수, 전문 영화상영관으로 변모시킨다. 광무대는 1920년대에 들어서자 구극뿐만 아니라 신극에도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1925~1926년 사이에 <토월회>가 광무대를 전속으로 사용한 것이 그것이다. 한편, 초창기의 단성사는 연예인(기생)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하고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복지사업을 펼쳐 야학이나 고아원 등에 기부금을 기탁했다고 한다.
연쇄극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진짜 영화의 제작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단성사의 라이벌이던 조선극장 일본인 소유주 하야가와가 <춘향전>을 제작·상영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배우만 조선인일 뿐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춘향전>에 충격을 받은 박승필이 조선인의 자본과 기술, 단성사와 광무대의 인력들을 동원해 만든 영화가 <장화홍련전>이니, 일제 강점 하에 영화산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민족 간의 긴장감과 신경전이 느껴진다.
군산 희소관과 군산극장
<만인보>에는 군산 지역을 대표했던 극장인 군산극장(군산좌)과 희소관에 관한 시들이 나온다. 그 중 희소관 변사 마정봉의 제자가 되었지만 연기를 못해 쫓겨나야 했던 고은 시인의 젊은 시절 일화가 흥미롭다. "충청도 내포 일대까지 / 전라남도 송정리 목포까지 / 그 이름 자자한 변사 마정봉 / 작달막한 땅키에 오동통한 몸매 / … / 사흘 굶어도 굶은 티 안 날 몸매 / 여름인가 하면 / 반바지에 스타킹 신고 / 백구두 신은 변사 / 군산 희소관 변사 / 열일곱살부터 변사로 나서 / 희소관이 / 남도극장으로 바뀐 뒤에도 / 변사 // 저 아리랑고개는 무슨 고개려뇨 / 저 고개는 쓰리랑고개요 / 울고 가는 눈물고개 울음고개요 / 아 기구한 운명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 / 저 아리랑고개 너머 / 그 어드메 이내 몸 머물 데 있을쏘냐 // 이렇게 청승 넣어 풀어 나가면 / 극장 안 무성영화 울음바다 / 엉엉 울음바다에 이어 / 박수소리로 바뀐다 / 마정봉 / 마정봉 / 호남의 제일 변사 마정봉 / 처녀들 달라붙고 / 기생들 자동차에 태워 붙잡아간다 // 나는 그의 제자가 되었으나 / 변사로 나갔으면 / 그의 누이를 준다 했는데 / 그의 제자 되었으나 / 잠수함 잠망경 같은 / 마이크 앞에서 / 눈앞이 캄캄하여 도망치고 나갔다 // 그 마정봉 도리어 극장 사장 되더니 / 변사 노릇 끝나고 / 무성영화 호시절 끝나고 / 병들어 세상 떠났다 / 멋진 상아파이프 남기고 / 건달 아들 남기고"('마정봉', 5권).
연구들에 의하면, 1906~1914년 사이에 군산좌와 명치좌가 개관하고 1920년대 초 희소관이 개복동에 개관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군산좌와 희소관 모두 일본인이 경영주였는데, 군산좌는 1925년 화재로 인해 1926년 개복동에 군산극장을 신축하여 연극과 영화를 공연하였다. 군산극장은 1996년 우일시네마로 바뀌었다가 2007년 폐관된다. 군산극장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희소관은 전북 최초의 영화 전문상영관이었는데, 해방 후 남도극장, 국도극장으로 명칭이 바뀌며 여러 변천과정을 겪다가 결국 군산극장과 비슷한 시기에 사라지게 되니, 이제 우리의 기억과 역사 속에서만 만날 뿐이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