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조진웅은 2016년 상반기를 풍미한 배우다. '조진웅 천하'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신드롬을 일으킨 tvN 드라마 '시그널'에서 우직한 이재한 형사를 통해 정의를 부르짖었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는 일본인이 되고 싶은 조선인 코우즈키를 통해 '근엄한 변태'라는 캐릭터를 완성했다.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의 영화 평론가들이 "코우즈키를 중심으로 한 후속작을 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조진웅이 신작 '사냥'에서는 '악의 탈'을 쓴다. 시골의 한 야산에서 금광을 발견하고 금을 캐기 위해 산에 올랐다가 우연한 사고를 겪으면서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 사냥꾼이 된다. 전작 '끝까지 간다' 속의 인물 박창민보다 더 절제된 이미지를 통해 야성미를 뿜어낸다.
매 작품마다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얼굴로 관객과 마주하는 조진웅을 지난 27일 서울 삼청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배우를 요리의 재료라고 일컬으며 "캐릭터를 만들 때 작품의 본질을 깨닫는 게 가장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배우 조진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사냥'의 동근, 나쁜 놈 아니죠"
이번 작품에서 조진웅은 사납다.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아 있고, 표정변화도 거의 없다. 말수도 적다. 다친 노인의 목을 조르면서 죽이려고 한다거나, 금을 캐는 걸 방해하는 노인을 향해 총을 겨눈다. 기괴한 폭발력을 보였던 박창민과는 또 다른 지점의 캐릭터다. 그러면서도 다소 어수룩한 면도 있다. 조진웅은 동근에 대해 '나쁜 놈'은 아니라고 말했다.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은 정말 나쁜 놈이에요. 마약 밀수하고 사람 때려죽이고 그렇잖아요. 동근은 정체불명의 엽사일 뿐이에요. 금을 캐러 온 사람 혹은 동호회 회원이에요. 단지 리더 격인 거죠. 다만 사람 자체가 무겁고, '돈을 벌러 왔다'는 비즈니스적 마인드가 강한 사람이죠. 대사에도 있잖아요. '지긋지긋한 빚 탕감하러 온 거 아니냐'고요. 그러던 중에 사고가 나면서 일이 꼬이고, 극한의 상황까지 가게 된 거죠."
이전 작품에서 촬영에 돌입하기 전 캐릭터에 대한 모든 연구를 마치고 촬영에 임하곤 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산이라는 난관 때문에 현장에서 캐릭터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그 과정이 다소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제작을 했는데, 그 때 말하길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의미 없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산 때문에요. 현장에 던져져야만 할 것 같다고요. 합리적으로 합을 다 짜놨는데, 산에 가니까 다 바뀌는 거예요. 콘티도 바뀌고요. 그러면서 심정변화도 느껴지더라고요. 제작진이 대처 능력이 좋아서 다행이었죠."
배우 조진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본질을 깨닫는 게 중요하죠"
조진웅의 연기 변신은 실로 놀랍다. '허삼관'에서는 서민의 얼굴을 보였다가,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는 똑똑한 선비, '암살'에서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거는 독립군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시그널'과 '아가씨', '사냥'까지 그 어느 작품에서도 조진웅만의 클리셰가 느껴지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 그만의 비결을 들어봤다. 그는 요리에 빗대어 표현했다.
"배우는 재료인데, 이 재료가 어디에 담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죠. 제가 파스타에 들어간 면이었는데, 다음 작품은 곱창전골이에요. 그럼 파스타 면 대신 전골에 어울리는 면을 만들어야죠. 당연히 바뀌는 건데, 정확히 바뀌려면 본질을 깨달아야 해요."
그는 본질을 깨닫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감독과의 대화를 꼽았다.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감독과 대화를 나누며 캐릭터를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작가나 감독이랑 얘기하면 쉽게 풀려요. 외향적으로 살을 뺀다든가, 아니면 목소리 톤이나 리듬, 제스처의 크기 등에 관해 얘기하죠. 그러면 요리에 맞는 재료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확실하게 그 캐릭터가 된 뒤 현장에 가면 감동이 느껴져요. 그 때부턴 현장이 정말 재밌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배우들마다의 습관이 나오기 마련이다. 오열하기 전, 화를 내기 전 등의 타이밍에 꼭 드러나는 배우마다의 표정이 있다. 그 습관이 너무 뚜렷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조진웅은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정말 새로운 습관을 가져와 버리면 제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예를 들어 코우즈키가 그랬죠. 코우즈키는 서브텍스트가 별로 없는데, 그런 경우에는 제가 혼자 만들어요. 제가 쓴 스토리를 통해 인물을 잘 그려내면 제 습관이 안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이번 작품에서 1인 2역이었는데, 둘 다 그렇게 만들려고 했어요."
배우 조진웅.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안성기 선배처럼 될 수 있을까"
'사냥'에서 조진웅은 안성기와 대적한다. 안성기는 59년 연기 경력의 베테랑 배우다. 조진웅은 안성기를 보면 자신은 안성기처럼 오래 연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저는 끈기가 별로 없어요. 선배님처럼 꾸준함이 없어요. 그렇게까지 오래 못할 거예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안 하고 싶다'가 아니라 '못 할 거 같다'예요. 내가 너무 나를 잘 아니까요. 꾸준함을 지키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비록 그는 오랜 경력의 배우가 될 수 없을 것이라 얘기했지만, 과연 대다수의 그를 바라보는 대중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인물을 그려내는 그는 이미 충무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 "내가 지금까지 연기할지 정말 몰랐다"고 말하는 조진웅을 보기를 기대해본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