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란

입력 : 2016-11-07 오전 10:28:41
“효도했네.”
 
꽤 많은 어르신들께 들은 말이다.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보려고, 아니 관대하게 본다고 해도 난 딱히 부모님께 잘하는 딸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어르신들은 나를 효녀로 봐 주셨다. 단지 내가 괜찮은 대학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모든 욕망은 대타자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부르디외는 일상생활의 모든 양식에서 신분적 구별 짓기의 의식이 작동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 중 이러한 구별 짓기의 가장 강력한 기제가 학력이며, 학력은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묵시적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베블렌 또한 대학의 의식적 장식물인 학사모와 가운 등을 신분적 상징체로 보았으며, 입학식과 졸업식을 상류층의 특권 의식으로 여겼다. 학력을 통해 명예와 관련된 상류계급의 신분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유한 가족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교육의 사회적 보상 효과를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과열된 교육열에 한 몫 한다. 자식의 학력이 부모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 짓는 주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예로부터 유교와 사회적 상징체인 과거제 등의 영향으로 교육 자체에 관심이 많은 나라였다. 종사하는 직종에 따라 신분의 귀천을 따지는 유교사회의 전통은 현대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거급제'가 가졌던 상징성이 '대학합격'의 상징성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 사회에서 과거합격 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소유한 상징을 획득하기 위해 개인은 그 당시에도 치열하게 노력했다. 이처럼 예로부터 대개 우리나라는 사회적 신분의 상승은 교육을 통한 상징적 지위의 획득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상수, '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의 상승’ '90년대 이후로 대학진학률이 급격하게 높아진’ 변수를 설명할 수 없다. 궁극적 원인을 알기 위해선 일단 지금의 기성세대가 20대였을 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20대였을 때, 대학의 상징성
1961년 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박정희 정부는 무너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절이었다. 노동력을 활용할 산업이 없어 실업률이 20%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거의 모두가 가난했다. 출발선상은 비슷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박정희의 계획이 성공함으로써 변했다. 가난한 한국은 이례적인 수준으로 급격히 발전했다. 어느 정도의 능력과 많은 운이 따라줬다면, 계층의 피라미드를 올라가기 쉬운 편이었다. 따라서 계층변화가 격렬했다. 그러나 이 흐름을 타지 못 했던 노동자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노동력의 수요에 대한 공급량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낮게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부는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탄압을 일삼았다. 특히 가장 큰 억압을 받았던 대상은 저 학력 계층이었다. 이 때 새로운 유형의 빈부격차가 탄생했다. 저 학력 계층의 노동자와 윤택한 생활수준을 누리는 특권계층과의 격차였다. 양극화는 구조적으로 빠르게 고착됐다. 
 
가와이 노리코는 격렬한 계층 이동이 일어났던 당시에 거주지의 이동이나 직업의 이동 등 다른 이동의 효과에 비해 학력에 의한 지위와 경제력 이동의 효과가 확실성이 높았다 말한다.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을 위해 필요한 기간은 30년 정도로 상대적으로 길었으나, 계층 이동에 가장 믿을 만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많은 수험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길 원했다. 대학생은 소수의 지식인과 능력자로 인식됐다. 그들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특권 계층으로 갈 수 있는 직장을 보장 받았다. 그러나 대학이 수용할 수 있는 학생의 절대적인 수는 적었다. 90년대 이전에는 지원자와 실제의 진학자 비율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지원자 전체의 약 50~60%정도만 대학에 진학 할 수 있었다. 대학에 대한 수요가 많았음에도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정원은 턱 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하여 많은 재수생과 진학미달성자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때의 진학미달성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교육에 불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학교 교육이 끝난 고30년 후에도 자신의 불충분했던 교육을 아쉬워한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느끼는 극심한 소외감 때문이다. 노동청의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까지 학력별 임금 격차는 계속해서 확대 되었다. 특히, 고졸자와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임금은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기성세대의 대부분이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학력별 임금 격차는 계속 늘어났고 이에 따라 계층 간의 괴리감 또한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기성세대는 이 때 학력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대학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교육에 대한 효과가 큼을 확인함으로써 교육에 대한 집착이 더 커졌다. 게다가 기성세대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 또는 능력 부족 같은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경제적 요인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대학을 가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강제적 대학 진학의 실패는 자신의 불충분한 교육에 대한 '한'을 더욱 가중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빠른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했다. 상대적인 부는 논외로 하고, 절대적인 부는 대부분 커졌다. 따라서 대개 기성세대는 자신이 수험생이었을 때 보다 자신의 자녀가 수험생일 때인 지금이 경제적으로 보다 여유롭다. 결국 기성세대, 학부모들은 외부적 요인(특히, 경제적 요건)이 자녀의 대학진학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자녀라도 대학을 보내서 자신의 '한'을 풀려고 할 것이다. 자신의 학력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기성 세대의 학력에 대한 집착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신이 직장생활을 통해 느낀 학력의 영향력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극복할 수 없는 큰 벽이다. 자신의 세대에서는 도저히 학력의 벽을 극복할 수 없었고, 이를 극복하고 싶은 욕망이 자녀의 대학진학에 대한 집착으로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달라진 현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대학의 절대적인 숫자자체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렇게 대학이 많아짐에 따라, 대학교육의 부실화가 유발됐고 정원마저 채우지 못하는 대학교도 생기게 되었다. 대학의 공급과잉으로 인해 재학생 충원율이 70%미만인 일반대학이 총 191개 대학 가운데 11%인 21개알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너무 빨리 시대가 급격하게 변화해 버린 것이다. 몇 십 년전만 해도 '학문의 정당'이었던 대학이 구조조정 돼야 하는 기관으로 그 의미가 퇴색 된지 오래다. 대학진학 자체에 대한 상징성이 사라져 벼렸다. 대학 졸업자들은 더 이상 지식인도 특권계층으로 가는 지름길의 코스를 밟는 사람들도 아니다. 대학 졸업만 하면 좋은 취업이 보장된다는 말은 다 옛 말이 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신규 대졸자 중 대기업 취업자 비중은 10%중반대로 매우 미미한 비율이다. 한국 경제가 저 성장함에 따라 대 기업 등 일명 특권계층으로 갈 수 있는 일자리의 증가까지 정체하는 경향이다. 게다가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11년 2월말 4년제 대학을 졸업한 26만 2천여 명 가운데 6만명 약 25%가 실업 상태이다. 
 
대학진학의 희소성이 사라짐에 따라 그에 대한 문화적 자본의 가치가 감소 했지만, 대학 진학률은 여전히 80%내외에서 변함이 없다. 아직도 대학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다. 시대는 변화했으나 가치관의 변화는 이를 따라가고 있지 않다. 그 메리트가 떨어졌음에도 대학은 전보다 더욱 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예전에는 대학이 특권계층으로 가기 위한 확실한 길이었다면 지금은 평범하게 살기 위한 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높은 대학진학률
그렇다면 대학은 더 이상 신분적 위세 차이를 만들 수 없는 것, 구별 짓기의 기제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장미혜에 따르면 학력자격을 기반으로 현재의 계급에 도달한 전문/경영인 또는 화이트칼라 계급은 학력자격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큰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들은 대부분 상속받은 재산 보다는 성취한 학력에 의해 계급 이동을 해왔다. 따라서 학력의 희소성이 낮아질 때,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러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스스로에 대한 재교육 또는 자녀에 대한 교육투자를 강화한다.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계급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교육에 대한 투자를 강화한다. 그리고 희소성이 떨어진 대학을 대신할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다른 계급과 자신들을 여전히 구별 지을 수 있는 또 다른 희소성을 가진 문화자본을 찾기 위해 열을 올린다. 그리고 찾았다. 명문대학이다. 이제 그들은 명문대학으로 자녀를 진학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중층과 하층도 상층과 같은 계층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모방한다. 그들의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갖은 힘을 다한다. 설사 그렇게 교육에 투자할 만큼의 여건이 안 된다 하더라도. 중층과 하층은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상층을 모방하고, 상층은 그들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끊임없이 구별 짓기를 수행한다. 따라서 대학진학률이 높아지고 대학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대학 자체에 대한 희소성은 떨어졌지만, 교육열은 여전한 아니 더 심해져만 가고 있다.
 
하지만 대학교육과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역량간의 괴리 증가로 인한 대학교육에 대한 만족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고 대졸자의 눈높이에 맞는 양질의 일자리보다 대졸자의 수가 더 급격하게 늘어나서 청년실업은 가중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은 이를 의식해서 학교라는 자신의 타이틀을 잊었는지 실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과를 통폐합하기 일쑤다. 그런데 청년실업 난 속에서 중소기업은 인력이 부족한 인력 미스매치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추위는, 수능이 머지 않았음을 알린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란 정말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수리고등학교 2013년도 대입수능. 사진/바람아시아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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