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치가 요동치고 있다. 지난 8일(현지시간) 치러진 미국 45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예상을 깨고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KO패 시켰다. 아웃사이더 정치인 트럼프의 어퍼컷에 많은 사람들은 한동안 놀라워했다. 그러나 트럼프 현상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처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한 미국언론과 정치전문가들의 편협한 시각이 문제였다.
트럼프 승리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의 여파라고도 볼 수 있다. 지난 6월23일 브렉시트 찬반 투표에서 영국인 51.9%가 찬성함으로써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결정됐다. 브렉시트 여론은 경제문제가 핵심이다. EU의 재정 악화가 심화되자 영국이 내야 할 분담금 규모가 늘었고,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 등을 중심으로 EU 탈퇴 움직임이 확산됐다. 여기에 취업 목적의 이민자가 증가하고, 특히 지난해 말 시리아 등으로부터의 난민 유입이 계속되자 EU 탈퇴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미국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국민들의 이민자와 기존시스템의 거부, 워싱턴과 엘리트 계급에 대한 저항이 투표로 표출된 것이다. 이번 투표결과는 미국인들이 더 이상 세계화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도 보인다. 일부 미국인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 삶의 수준을 되찾지 못했으며, 절망했다. 노동자층은 이러한 기분을 더 크게 느꼈으며 트럼프 선택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언론은 자국민들의 불만을 들을 줄 몰랐다. 정치학자와 여론조사 전문가, 기자들은 줄곧 클린턴의 승리를 예고했다. 적어도 미디어 공론장에서는 트럼프의 승리를 상상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트럼프가 단지 선동가이자 포퓰리스트, 저속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내팽개쳤다. 미국 선거사상 이번만큼 언론이 한 정당만을 다룬 적은 없었을 것이다. 언론이 전례 없이 한 후보(트럼프)에게 상처를 가하자 침묵하던 유권자들은 부당하게 여겼고, 트럼프에 투표했을 확률도 크다.
이 와중에 트럼프 지지층 중 일부 유권자들은 자신의 지지후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정치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2002년 4월21일 치러진 프랑스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이나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 펜이 결선에 오르지 않았던가. 이러한 현상은 내년 4월 프랑스 대선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당장 오는 20일 실시되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결정전(오픈 프라이머리)에서 판세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
경선에서 맞붙을 쥐페와 사르코지 간 대결구도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는 트럼프 현상의 덕을 볼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 알랭 쥐페 보르도 시장은 줄곧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트럼프 선거에서처럼 ‘침묵하는 다수(majorité silencieuse)’가 사르코지 후보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르코지 후보는 트럼프 스타일을 차용하여, 쥐페를 ‘프랑스인들이 경고하고 있는 시스템과 언론이 선택한 후보자’로 부각시키는데 몰두하고 있다.
또한 국민전선은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승리에 고무되어 내년 대선에서 승리를 자신하는 분위기다. 마린 르 펜 대표는 트럼프의 당선 후 곧바로 ‘자유로운 미국인의 승리’라는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르 펜의 측근들은 내년 프랑스 대선에서도 트럼프 현상이 재현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이번 미국 대선처럼 엘리트(국립행정학교 출신, 지식인, 대중과 먼 정치인)에 대한 저항과 정체성운동, 민족운동, 보호무역주의, 외국인·무슬림에 대한 혐오, 반(反)유럽 정서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이 요동치는 세계 정치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당장 한국은 이 변화에 민감해 할 여력이 없다. 왜냐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문제를 눈앞에 두고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치를 강타하는 포퓰리즘에 우리 정치가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언론 플레이나 여론조사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트럼프의 승리를 통해 알아채야 한다. 내년 대선을 꿈꾸는 후보들은 국민의 불만과 욕구가 무엇인지 깊이 새겨듣고 밑바닥 민심을 읽는데 총력을 다 하는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