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해곤기자]한국을 둘러싼 통상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수출 중심 정책을 펴는 한국 입장에서 통상환경의 변화는 언제나 불안요소로 작용한다. 게다가 반세계화를 정면에 내건 선진국들은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반세계화의 움직임은 주류가 됐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일 협정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경제규모가 큰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관심을 모았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무산된 것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이다.
지난해 10월 잠정 타결된 TPP는 미국과 일본, 캐나다, 멕시코, 호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12개 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각국 의회의 비준 동의만을 남겨둔 상태였지만 미국의 주도로 진행됐던 TPP에서 미국이 빠지면 사실상 와해라고 봐야 한다.
트럼프는 'TPP가 미국의 제조업을 파괴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반대 입장을 확실히 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공화당이 상·하원 다수당을 차지하면서 오바마 대통령 임기 내 TPP 비준도 물거품이 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민주·공화당 지도부가 TPP 비준 절차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고 백악관에 통보했고, 오바마 정부도 TPP를 더 진척시킬 방법이 없음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미국을 제외시킨 상태에서 TPP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미국이 빠진 TPP는 의미가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TPP가 침몰하면서 TPP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이 주도했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급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을 계기로 RCEP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도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협상에 힘을 쏟겠다는 의지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9일부터 페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RCEP의 조속한 타결을 의제로 제시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RCEP은 한국과 일본, 중국 3국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 그리고 호주와 인도, 뉴질랜드의 16개국 다자 FTA다. 국내총생산(GDP) 면에서는 TPP가 세계 GDP의 40%에 달하는 27조7000억달러로 RCEP은 이보다 낮은 21조8000억달러 규모지만 소비시장은 TPP(7억9000만명)의 4배에 달하는 34억2000만명에 달한다. 교역규모도 TPP의 9조4000억달러보다 많은 10조6000억달러다.
사실 한국은 TPP협상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협상이 타결될 때만해도 한국은 가입선언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정부는 TPP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RCEP의 조속한 협상 타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RCEP도 한국 통상에 있어서 호재만은 될 수 없다. RCEP 협상에 있어 중국과 인도는 낮은 수준의 시장 개방을 주장하는 등 개방 범위가 넓지 않아 속도가 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있어서도 큰 실익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과 경쟁에 있는 중국의 간섭 강화도 한국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불법어선 조업 등 최근 불편해진 한·중 관계를 생각하면 중국이 RCEP을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할 우려도 크다.
지난 9월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참여한 16개국 정상들이 'RCEP 정상 공동선언문'을 발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해곤 기자 pinvol197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