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탔다. 무의식적으로 좌석 가장자리를 찾아 앉는다. 고개를 드니 맞은편 좌석 위에는 ‘임산부 먼저’라는 스티커가 크게 붙어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도 잠시. 덩치 큰 남자가 풀썩 앉으며 스티커를 가린다.
‘저긴 임산부 자린데... 다른 데도 자리 많은데 왜 하필 저기에’
옆에 앉은 친구와 저기는 임산부 좌석이 아니냐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어보지만 스마트폰을 보는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는다. 통학 4년, 이제 학교로 가는 지하철은 눈 감고도 탈 수 있다. 임산부 배려석이 생긴 지도 햇수로 4년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임산부 배려석에 익숙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바람아시아
지난 2013년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는 보건복지부의 요청에 따라 열차 내 임산부 배려석 운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좌석 뒷편에 ‘임산부 먼저’라는 안내 스티커만 붙여, 언뜻 보기에 일반석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후, 좌석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 2015년에 의자부터 바닥까지 분홍색으로 칠하는 디자인으로 변경했다. 임산부 배려석은 지하철 한 칸 당 두 좌석씩 위치해있다. 한 열차 당 총 여덟 개의 임산부 배려석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를 위해 비워두는 자리다. 하지만 요즘 비어있는 임산부 좌석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4~50대 연령의 여성과 남성이 다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임산부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수준도 현저히 낮다. 임산부 안내 스티커만 붙여져 있을 뿐 일반 좌석과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아 모르고 앉는 사람이 많다. 또 임산부석임을 알고 있더라도 “앉아 있다가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면 되지”, “임산부가 많지도 않은데 앉으면 어때”, “배려석이지 의무석은 아니다”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임산부 A씨는 “양보는 본인의 선택이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좌석을 비워두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10월 10일 임산부의 날을 맞이해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산부가 아닌 승객이 임산부를 배려하지 못한 이유가 ‘임산부인지 몰라서’(49.4%)인 것으로 나왔다. 임신 초기의 경우, 또는 품이 넓은 옷을 입은 경우엔 확실히 임산부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임산부 가방 고리 혹은 배지를 달고 다녀도 양보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사람 대개는 스마트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자고 있어 배려의 타이밍을 놓칠 가능성이 높다. 노약자석은 만원 지하철임에도 자리가 항상 비워져 있다. 임산부 배려석에도 “앉아 있다가 비켜줄 것”이라는 인식보다 “처음부터 비워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오메가패치’가 떠오른다. 오메가패치는 임신이 가능한 남성을 지칭하는 ‘오메가’와 연예인 파파라치 전문매체 ‘디스패치’의 ‘패치’를 합친 말이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남성의 사진을 모자이크 없이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상세한 날짜와 장소를 다이렉트로 제보 받았고, 계정이 개설된 지 일주일 만에 200건이 넘는 남성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몰카를 찍힌 남성들은 초상권 및 명예훼손으로 오메가패치를 고소하며 한때 논란이 일었다.
‘오메가패치’의 등장에 사람들은 왈가왈부 의견이 많았다. 강남패치 혹은 소라넷에 대한 미러링, 명예훼손, 성대결, 남혐 등 여러 이슈가 함께했다. 하지만 본질을 먼저 생각해보고 싶다. 임산부 배려석이 잘 지켜졌다면 ‘오메가패치’가 등장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많은 사람이 사진 공개라는 비윤리적인 수단에 관심을 가질 때, ‘오메가패치’의 본질은 묻혀갔다.
물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사울 D. 알린스키는 “특정한 목적이 특정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고 말했다. 이를 ‘오메가패치’에 적용해 볼 때, 임산부 배려석의 제대로 된 운영을 위해서 남성을 향한 몰카를 공개하는 것이 윤리적인 수단이었는가 질문할 수 있다. 여기서 또 알린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수단과 목적의 윤리에 대한 사람의 관심은 그가 갈등의 현장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나 하는 거리에 비례한다.” 곱씹어보면, 임신 가능성이 없는 남성들이 왜 그렇게 수단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더 집착했는지, 이제는 느껴진다.
‘오메가패치’가 한번 기승을 부렸음에도, 아직도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은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 좌석을 비워놔야 한다는 의식조차 부족하다. 학교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면 항상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노약자석은 비어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어구구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만약 노약자석에 ‘할머니 오시면 비켜드려야지’라고 생각한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면, 할머니는 앉지 못하셨겠지. 여전히 사람들은 핑크색 좌석에 거리낌 없이 엉덩이를 붙인다. 과연 저 자리가 비어있을 날이 올까, 생각하며 오늘도 지하철을 탄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에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