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광표기자] 롯데의 한 세대가 종언을 알리고 있다. 롯데의 창업주 '신격호 시대'의 종언은 한국 재벌사의 한 페이지가 마무리됨을 의미한다. 신 총괄회장은 국내 재벌그룹 가운데 경영 일선에 영향을 끼쳤던 마지막 1세대 창업주다.
그런 그가 최근 한 월간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경영철학과 소신을 밝혔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려 '은둔의 경영자'라 불리던 그에겐 이례적 행보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직원들이 실업자가 안 되도록 하는 것이 회사의 가장 큰 봉사", "남, 녀 관계 없이 잘 하는 사람이 해야한다" 같은 소신 있는 발언을 이어가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창업 1세대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뽐냈다.
실제 신 총괄회장이 우리 경제수준 향상에 기여한 바가 작지 않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신격호는 일본으로 밀항해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주위 사람들로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요즘으로 보면 한 일본 자산가로부터 엔젤투자를 받아 시작한 사업이 롯데그룹이다.
끊임없는 혁신과 상품개발로 크게 성공한 신격호는 귀화의 제안을 모두 물리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계기 삼아 본격적인 국내 투자에 나섰다. 당시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가져온 돈이 1조 5000억원 정도라고 한다. 이는 4년에 걸쳐 완공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과 비슷한 수준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원이었다. 신 총괄회장의 고국투자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고령의 창업자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깊게 다가온다. 인터뷰를 한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신 회장은 아직도 자신이 총괄회장으로 롯데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거나 "신 회장의 '기억의 커튼'이 내려가고 있었다"는 말로 정신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최근까지 성년후견인 공방을 이어가고 있을 정도로 그의 상황이 온전치 않다는 것이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신 총괄회장은 최근 열린 두 번째 성년후견 개시 심판사건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그가 나온 동영상만 재판부에 제출해 그의 장남 신동주가 '꼼수'를 부린다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신 총괄회장의 치매약 복용사실이 알려지고 법원의 한정후견 지정으로 재판 결론이 난 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이 사실상 종식되는 듯 했다. 그러나 진흙탕 싸움은 여전하다.
여러 정황상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신 총괄회장의 신변은 여전히 장남 신 전 부회장에게 맡겨져 있고 그의 유불리에 따라 악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심지어 신 전 부회장 측은 지난 10월 신 총괄회장을 오랜기간 동안 보살펴 왔던 간병인 9명도 전원 교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개인 사정이나 일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SDJ 측의 조치에 따라 교체됐다고 한다. 굳이 신총괄회장의 손발 역할을 해 왔던 간병인들을 교체한 것도 아버지의 불편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떻게든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려는 '처절한 몸짓'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롯데그룹 고위 관계자는 "신 총괄회장은 무엇보다 전문적인 치료와 안정이 절실한 상황인데, 현재 신동주 전 부회장의 부양 아래 제대로 된 의학적 치료는커녕 건강과 명예가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경영권 분쟁 초기부터 "아버지가 인정한 장자승계"를 명분으로 내세워왔다. 이를 위해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꾸준히 알려야만 했다.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미약 상태를 기회 삼아 자신의 '선전도구'로 악용하고 있는 장남의 악행이 멈추기 전에는 신 총괄회장의 평온한 노년은 요원해 보인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이제라도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는 길로 들어서야 한다. 자신의 권력욕과 부친의 명에를 맞바꾸는 일은 중단해야 마땅하다.
이광표 기자 pyoyo8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