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국가는 과거에는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와 비교됐지만 최근에 들어서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체제임을 전제로 그 안에서 시장자본주의국가와 국가자본주의국가로 구분되는 듯하다.
한국은 과거에는 국가자본주의로 국가가 보증하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이 국제자본시장에서 조달한 자본을 국내기업들에게 공급하고 은행의 지배주주로 유동성 공급을 통제하던 시대가 있었지만, 사경제가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가면서 국가자본주의가 아닌 시장자본주의의 그림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금융기관 지배구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지난 8월부터는 ‘금융기관의 지배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지만 아직도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지배구조법의 의미와 개선과제 등을 정영철 변호사(법무법인 시공)로부터 들어 본다.
과거 국가자본주의하에서 금융이란 즉 은행이었다. 금융회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고, 금융기관은 정부조직의 일부로, 금융당국의 행정행위 대상으로조차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경제의 국가경제 내 비중이 점차 커져가면서 금융당국이 사경제를 규율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드러났다. 지난 세기말부터 금융규율시스템의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게 된 이유다.
금융기관 구조개선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설립됐다. 예금자보호대상이 확대되면서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회사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한다. 또 금융당국은 적정자본과 자산건전성 이외에도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인적·물적 결합체인 회사 내부 의사결정과정에도 주목하기 시작한다. 소위 ‘기업지배구조’를 금융기관의 중요한 규율대상으로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권회사와 지배구조 논의
자본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주체인 상장법인이 투자자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지배구조를 가져야 할 것인가가 논의의 출발점이었다. 시장에서 중요한 중개인인 증권회사 또한 어떠한 지배구조를 가져야 할 것인가라는 이슈 역시 덩달아 논의됐다.
여러 문제가 지적됐던 ‘감사’를 없애 버리고 미국처럼 독립된 사외이사로 구성된 이사회 내부 위원회를 만들어 보자는 주장과 사후 감사보다 사전 내부 통제시스템을 강제하자는 주장이 채택됐다. 증권회사에는 상장여부와 관계없이 준법감시인이라는 직함을 가진 임원이 하나 늘어났고 감사위원회가 이사회 내부 위원회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기업지배구조가 금융기관의 준법경영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증권회사뿐만 아니라 여타 금융기관에서도 동일한 메카니즘 채택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다만 이사회 내 감사위원회가 거대한 조직인 은행의 상시감사를 수행하거나 지휘할 수 있을지 불확실해 감사위원이라는 중간적 조직이 인정됐다. 감사위원은 상근이라는 점에서 감사위원회의 위원인 다른 사외이사와는 구별된다.
이러한 구조는 은행, 저축은행, 여전업, 보험사 등으로 확대됐고 적용대상의 범위 또는 사외이사의 수에 있어 자산액기준 차이만을 두게 됐다. 금융당국의 금융기관 지배구조에 대한 태도는 미국과 비슷하게 하되 기업의 비용측면을 고려해 점차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법 규정에서 모범규준으로의 변형
금융기관의 지배구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지배구조의 외연이 단순히 임원에 대한 통제와 감시시스템 구축뿐만 아니라 금융회사 주주 전체의 이익과 임원의 이익을 일치시키고, 나아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사회시스템의 일부로 확대됐다.
다만 금융당국은 개별 금융산업에 대한 규율법규와 감독규정에서 금융기관의 지배구조를 자세하게 정하고 수시 변경하기에는 행정적 부담이 너무 방대해진다는 현실을 감안해 법규정이 아닌 모범규준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는 금융당국이 기관의 지배구조가 법규정으로 입법화할만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국에서 거래소규정이나 관행 등으로 지배구조를 규율하는 현실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또 금융기관이 형식에 관계없이 금융당국의 바람을 거스를 수 없다는 한국의 현실을 전제로 한 것일 수도 있다.
모범규준의 좋은 점은 단순히 독립적 사외이사의 감시체계만이 금융기관 지배구조의 모든 것은 아니며 지배구조란 컴퓨터의 운영프로그램과도 같은 포괄적 개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나쁜 점은 지배구조란 법도 아닌 것이 그 성격이 모호하지만 할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것 정도로 인식하게 만든 점이다. 또 지배구조문제에 있어 모범규준에 나와 있는 것만 형식적으로 지키면 되는 것이며, 그 이외의 것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이 금융당국 내지 정치권과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금융기관의 최고경영자 승계 문제
상호금융을 제외하고 은행은 지배주주가 있을 수 없는 국내 유일한 금융기관이다. 그러나 은행은 우리나라 금융기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은행연구원은 없으며 금융연구원만이 있을 뿐이다. 은행연합회는 법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는 민법상 사단법인이지만 정부의 묵인 하에 개인 신용정보를 독점 관리해 왔고 그 대가로 정부는 회장 임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은행장 내지 금융지주회사 회장 승계문제는 은행의 장래를 위한 경영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들 간의 끊임없는 권력다툼과 유사했다. 미국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다수의 사외이사가 이사회에는 앉아 있지만 이들이 독립적으로 은행의 전략과 경영방향에 대해 의사결정을 내릴 능력과 의사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최고경영자 승계문제는 이사회의 중요한 권한이자 의무지만 시스템 확립은 고사하고 승계문제가 발생하기 이전에 미리 논의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은행 최고경영자 승계를 둘러싼 권력투쟁은 한국의 은행이 금융기관이지 금융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국제금융사회에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지배구조법) 국회 통과 및 시행
금융당국과 국회는 우리 금융산업 전체를 포괄하는 지배구조규범의 확립을 위해 수차례 모범규준과 법률초안의 형태로 여러 아이디어를 논의해왔고, 2015년에서야 지배구조법 최종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시행일은 올해 8월1일이다.
지배구조법에는 몇 가지 주목되는 점이 있다. 첫째,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통과에 수년이 걸렸다는 점은 우리 정치의 서글픈 현실이지만 지배구조가 중요한 금융정책목표 단계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중대한 발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금융회사 전체를 그 적용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회사가 법명에 최초로 들어가면서 금융기관이 금융회사로 공식적, 그리고 포괄적으로 인식됐다. 다만 금융업계에 설득당해 적용범위를 단순 자산기준으로 정한 것은 금융당국의 한계다. 금융회사의 사업특성에 대한 고려, 예보보험료나 금감원 분담금에서의 차별적 취급 등을 통한 경제적 유인과의 결합 등을 고려해 지배구조에 대한 인식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셋째, 가장 엄격한 지배구조를 제시해 앞으로 회사법에서 정하고 있는 대규모상장회사의 지배구조 변화 방향을 제시한 점이다. 물론 금융회사 나름 규율필요성 때문에 지배구조법에 추가된 조문도 많지만, 이사회의 권한, 이사회내 위원회 구성, 사외이사의 독립성 등 상장회사 일반에 확대 적용될 수 있는 지배구조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 부분도 상당하다.
마지막으로 금융당국의 늦장 대응에도 주목된다. 국회 통과 후 1년의 준비기간이 있었음에도 금융당국은 시행에 필요한 세부규정 제정을 미뤄오다 지난 7월30일에야 겨우 시행령을 통과시켰다. 지배구조는 정관 개정부터 시작하고 그 이후 그 하위규범 성격인 이사회규정이나 위원회규정 등이 개정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금융회사는 정관 개정을 위한 주주총회 소집을 내년으로 미루고 일단 그 하위규범부터 고치고 있다. 그것도 8월1일 이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실시하는 모습이다. 금융당국과 금융회사 모두 지배구조 문제는 여전히 귀찮은 간섭일 뿐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는 듯하다.
금융회사와 지배구조법에 대한 전망
지배구조법이 시행되면서 금융회사들은 앞 다투어 회사내부 규정을 개정했다. 내년 정기주총에서는 많은 금융회사가 정관을 개정할 것이다. 일단 형식적으로 국내 금융회사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지배구조 제도를 가지게 됐다. 그렇다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지배구조법에서 계열사와의 거래가 빠져 있고 여전히 개별 금융법규에 나눠져 있다. 지배구조는 단순히 하나의 기업에서 주주와 경영자간 이해관계의 일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업집단 내부의 거래관계에 대한 절차적·실체적 규율을 통해 이해상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계열사 거래도 지배구조법에 포괄해야 한다. 다만 금융지주회사 시스템을 통해 금융그룹의 발전을 촉진하고자 하는 정책적 목표를 저해해서는 안 된다.
둘째, 지배구조법의 집행메카니즘을 보다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경제시대에 외국의 다양한 지배구조시스템을 고려해 국내 금융회사에 적합한 지배구조를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복잡하고 엄격한 지배구조를 요구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엄격한 행정벌을 부과한다면 지배구조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법을 위한 법’으로 추락할 위험성이 있다. 향후 시행하면서 금융회사의 자산규모나 업무 성격상 준수하기 어려운 것들은 폐기하거나 다른 유인책을 고려해야 할 것이지 무조건 처벌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셋째, 지배구조면에서 금융회사 간 경쟁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 지배구조를 금융당국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 귀찮은 규정이라고만 인식하지 말고 이를 통해 서로 경쟁해야 할 중요한 분야라고 인식시키면 금융회사는 지배구조에 대한 자발적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법은 지배구조의 최소한이며, 금융회사가 보다 나은 지배구조를 고안할 여지를 남겨줘야 할 것이다. 임원의 성과급이 그 대표적인 예로 지배구조법이 얼마나 자세하게 규정할지에 대한 정도의 완급 고민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지배적 지위에 있는 소위 금융공공기관의 지배구조 문제가 있다. 국가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조금 더 벗어나 보다 시장자본주의로 넘어가야 할 때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시장에만 맡겨 경제적 약자의 자본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면 시장자본주의의 문제점 중 하나인 빈부 격차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금융공공기관의 비효율성 내지 자의성을 통제하지 않으면 결국 국민 세금의 낭비를 초래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책은행, 보증기관을 포함한 금융시장의 인프라를 어떻게 설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개별적인 기관 지배구조뿐만 아니라 시스템 전체로서의 지배구조에 대한 정책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많은 금융공공기관의 일부라도 민영화해 우선 경영실태를 공개, 통제받도록 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 주재로 지난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서민·중소기업 금융상황 긴급 점검회의’에 시중 은행장들이 참석한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국가미래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