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새해가 밝았지만 송구영신의 기쁨을 제대로 느낄 새가 없다. 국정은 여전히 어수선하고 언론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매몰돼 박 대통령을 둘러싼 과거사를 재탕 삼탕하기에 여념이 없다. 미래를 위한 화두는 사라진지 오래다. 최근에는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돼 그녀의 송환여부를 둘러싸고 대한민국 전체가 한바탕 술렁이고 있다.
이 와중에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 탄핵 심판을 어느 쪽으로 결론 낼지 여부를 놓고도 공방이 뜨겁다. 그간 왜곡되었던 역사의 시시비비를 가려 바로잡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백번 이해해 본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희망적인 일들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새 동력을 얻어야만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 편의 흐뭇한 미담으로 지면을 장식하고 싶다. 프랑스의 한 노숙자와 전직 국회의장이 만나 친구가 되고, 노숙자는 작가로 변신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지난 2013년의 어느 날, 파리 샹젤리제 인근 한 거리에서 47세인 프랑스 노숙자 장-마리 루골(Jean-Marie Roughol)은 72세의 전직 국회의장이자 헌법재판소장이었던 장 루이 드브레(Jean Louis Debré)를 만났다. 드브레 전 의장은 루골에게 자전거를 잠깐 맡아줄 것을 부탁했고, 몇 시간 후 자전거를 찾으러 온 드브레 전 의장은 루골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날 이후 드브레는 가끔씩 루골을 보러 왔고, 루골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걱정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브레는 루골에게 그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노숙자인 루골이 글을 쓴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루골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린 루골을 자주 구타했다. 결국 그는 12살에 가출했고 친구들과 함께 장난삼아 거리에서 구걸을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루골이 교육을 받았을 리는 만무했고 심지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따금 글을 쓰더라도 철자가 틀린 것이 수두룩했다.
그렇지만 루골은 드브레 전 의장의 격려에 힘입어 2년 간 자신의 어린 시절과 노숙자 생활, 거리에서의 아름다운 만남, 유명 연출가인 로베르 오셍(Robert Hossein)을 만나 연극에 출연한 이야기 등 갖가지 에피소드로 3권의 노트를 채웠다. 이 글을 드브레 전 의장이 읽고 루골이 다시 고쳐 쓸 수 있도록 도왔으며 둘은 헌법재판소 커피숍에서 만나 수차례 수정했다. 두 사람의 노력은 마침내 지난해 10월7일 프랑스의 유명출판사 깔망 레비(Calmann-Levy)를 통해 책 <나는 구걸한다(Je tape la manche): 거리의 삶>을 펴내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루골은 TV 방송에 출현하며 스타가 되었고 책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3만7000부 가량 팔렸다. 그리고 중국어와 한국어, 체코어로도 번역돼 곧 출간될 예정이다. 루골은 인세를 받아 길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옥탑방을 빌려 고역스러웠던 28년 간의 노숙생활을 청산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는 난방이 되는 자신의 집에서 손수 요리를 만들어 친구들과 이혼한 전처, 딸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사회 심리학자 짐바르도는 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네덜란드 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lius Escher)의 그림 ‘서클 리미트 IV’를 이용해 “선과 악 사이에는 극히 가는 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기에 그 경계를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으며 천사가 악마로도, 악마가 천사로도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프랑스 노숙자 루골이 전직 국회의장 드브레를 만나 작가로 변신하는 감동의 이야기는 선과 악이 각각의 고립된 범주가 아니라 ‘연속체의 일부’라는 짐바르도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좋은 환경을 만나면 선해지고 나쁜 환경을 만나면 악해진다. 상황이 우리를 크게 지배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 탄핵정국을 둘러싸고 지난 주 토요일에도 광장에서는 박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촛불과 이를 반대하는 맞불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의 본령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정반대로 치닫고 있어 두렵기만 하다.
정치인들이 한국의 사회환경을 바꾸기 위해 이데올로기 싸움을 당장 멈춰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프랑스에서 드브레와 루골이 이중주의 하모니를 연주하고 조화로운 세상의 예를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따뜻한 정치인들이 나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모니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