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돌연 대선 출마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정치적 행보를 시작한 지 불과 20여 일 만의 일이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제가 주도하여 정치교체를 이루고 통합을 이루려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고 밝혔다. “정치는 꾼들이 하는 것인데 자신이 너무 순수했다”고 토로한 그는 “자신의 중도하차는 능력보다 인격살해, 음해공작을 일삼는 한국의 정치문화 때문”이라는 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과연 그의 변은 타당한 것일까. 반 전 총장의 말대로 정치는 꾼들이 해야 하며 순수하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막스 베버는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의 본질을 갈등으로 보며 ‘갈등에 휘말리지 않고 합리적 행정을 구현하려는 관료’가 정치적 리더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정치적 지도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목표를 달성하려고 투쟁하고 헌신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순순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정치인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 논리에 비춰보면 반 전 총장은 정치인으로 거듭나는데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기보다 여론을 너무 과신했다.
여론은 몰인정하다.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듯싶지만 어느 날 싸늘하게 외면한다. 이렇게 휘발성이 강한 여론과 싸우려면 무엇보다 강단이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상품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도중하차한 반 전 총장의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아직도 여론조사의 지지율에 울고 웃는 후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을 뿐이다. 만약 기대 이상으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가 있다면 우쭐하는 대신 보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알맹이 있는 정책을 제시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프랑스에서도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정치인이 있다. 그 주인공은 엠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마크롱은 지난 2014년 8월 올랑드 대통령이 국민에게 새정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했던 인물이다. 당시 36세였던 마크롱은 ‘성장·활동·경제적 평등을 위한 법’, 일명 <마크롱 법>을 만들어 프랑스 경제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국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프랑스인들은 장관들 중 마크롱을 가장 좋아했으며 그를 통해 프랑스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지난 2015년 2월 ‘Opinion Way'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들이 성 발렌타인데이를 함께 보내고 싶은 정치인 1위로 마크롱을 꼽을 정도였다.
이런 지지에 힘입어 마크롱은 지난 해 4월 자신의 고향 아미앵에서 중도성향의 정당 앙 마르슈(En marche·전진)를 창당했으며 그해 8월 경제부 장관 옷을 벗어 던지고 대선행보를 시작했다. 프랑스인 84%는 마크롱의 이러한 선택에 박수를 보냈지만 올랑드 대통령은 마크롱이 ‘요령 있게 자신을 속였다’고 인식했고 당시 수상 마뉘엘 발스도 신의를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마크롱은 이러한 비난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이에 걸 맞는 정치 프로젝트를 준비해 갔다.
물론 마크롱은 이번 대선을 거머쥐는 것까지 꿈꾸진 않았다. 그러나 신의 도움이 마크롱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공화당의 대선 후보 프랑수와 피옹을 둘러싼 부패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그의 지지율은 급락하는 반면 마크롱은 급등하고 있다. 지난 3일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 BVA-Salesforce가 발표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1차 투표에서 마크롱은 21~22%를 얻어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 펜(25%)에게 뒤지지만, 결선투표에서는 66%를 얻어 르 펜(34%)을 압도적으로 따돌릴 것으로 예상된다. 여론조사를 과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는 프랑스 대선에서 30대의 젊은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여기서 마크롱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인의 소신과 능력의 문제다. 반 전 총장을 비롯한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이 피 땀 흘려 리더십을 배양하고 정책을 고안해내기보다 정치를 안이 하게 생각하고, 모셔주기만을 바라며, 이 정당 저 정당을 기웃거린다. 그 어떤 정치적 계산도 하지 않고 패기로 한판의 승부를 거는 마크롱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마크롱은 다른 정당과 합당하지 않고 나라를 가로 막는 밀실 협약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쐐기를 박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밀실 협약을 하고 있을 일부 정치인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철렁한다. 한국정치가 비용대비 생산성을 높이려면 이런 구태를 청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 정치인들의 소프트웨어를 바꿔야 한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