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상법 개정안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정경유착이 확인되자, 재벌개혁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민주화가 재부상했다. 이에 야당을 중심으로 상법 개정안을 추진하며 여론의 동력을 끌어올렸다. 여당을 비롯한 보수진영도 조기 대선 가능성에 대놓고 반대하지 못하는 기류다. 숨 죽이며 여론의 동향을 살피던 재계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결사항전에 나섰다.
경제계는 상법 개정안에 대해 일률적이고 강제적인 지배구조 수술이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훼손한다며 강하게 반박했다. 장기불황과 글로벌 경쟁으로 지친 기업들이 경영자율성마저 뺏기면 자칫 ‘테이블 데스’(수술중 환자사망)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다. 재계가 지목하는 쟁점 조항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집중투표제 의무화 ▲근로자대표 등 추천자 사외이사 의무선임 ▲다중대표소송 도입 ▲전자투표제 의무화 ▲자사주 처분규제 부활 등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임과 집중투표제 의무화의 경우 1주 1의결권 등 시장경제의 원칙을 깨는 것으로, 해외 투기자본이 이를 악용하려 들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근로자대표 등 추천자 사외이사 의무선임에 대해서는 회사 발전보다 근로자와 소액주주의 이익만 주장해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논리다. 또 다중대표소송은 주주간 이해 상충의 소지가 있고 소송 리스크가 확대되며, 전자투표제 의무화는 악의적 루머공격 시 투표쏠림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자사주 처분규제 부활은 경영권 방어가 힘들어져 불확실성이 가중된다는 게 논쟁의 핵심이다.
앞서 지난 8일과 9일 이 같은 의견을 여야 각 정당에 전달한 대한상공회의소는 “시장의 꽃이라는 주식제도는 1주1의결권 원칙이 생명”이라며 “주주 의결권 행사 방법과 이사회 멤버 구성까지 규제하는 선진국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감사위원을 분리선임하는 나라도,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나라도 전무하며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곳은 러시아, 칠레, 멕시코 등 3개국뿐이라는 설명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도입 시 헤지펀드 등 외국계 기관투자자들의 이사회 장악이 수월해진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했다. 한경연에 따르면, 집중투표제가 도입될 경우 외국계 투자기관이 선호하는 이사 한 명을 무조건 이사회에 포진할 수 있는 기업이 10대 기업 중 절반이다. 삼성전자,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은 이사 선임에 있어 외국기관이 연합할 경우 이들이 선호하는 이사 최소 1인을 선임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의 경우 헤지펀드 등 외국계 투자기관들이 연합할 경우 기업당 3~5명 수준인 감사위원을 싹쓸이할 회사가 10대 기업 중 여섯 곳이다. 총수와 임원 등 내부자, 전략적투자자, 연기금을 포함한 국내 기관투자자를 합쳐도 삼성전자, 현대차, LG전자, 기아차, SK이노베이션, 현대모비스 등은 외국 기관들의 감사위원 독식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경연은 헤지펀드가 이사회에 이사 1인을 포함시켜 문제를 발생시킨 전례로 칼 아이칸 사태를 들었다. 지난 2006년 칼 아이칸은 다른 헤지펀드와 연합해 KT&G 주식 6.59%를 매입했다. 당시 KT&G는 집중투표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칼 아이칸은 이를 악용해 자신들의 사외이사 1인을 이사회에 진출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KT&G에 부동산 매각, 자사주 소각, 회계장부 제출,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의 기업공개 등을 요구했다. KT&G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총 2조8000억원가량의 비용을 투입했고, 칼 아이칸은 12월 주식매각 차익 1358억원과 배당금 124억원 등 1482억원 차익을 실현하고 떠났다. 이른바 '먹튀' 논란이다.
한경연이 15일 주최한 ‘상법 개정안의 쟁점과 문제점’ 긴급 좌담회에서는 일부 전문가들이 이 같은 경제계 의견에 힘을 보탰다. 김선정 전 상사판례학회장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나 회계투명성 제고가 단지 소수 주주가 감사위원을 선임하는 외형적 틀을 갖춘다고 해결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천문학적인 회계부정 사건이 발생한 일본 도시바의 경우 이사 5인 중 3인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정도로 외형적 정비가 잘 돼 있었음에도, 결과적으론 작동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송종준 전 기업법학회 회장은 “이번 상법 개정안이 모자회사 등 결합기업을 다중대표소송의 적용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들 결합기업을 모두 단일 경제적 동일체로 취급하는 것은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고 비판했다. 이어 “원론적으로 상법은 기업을 옥죄는 법이 아니라, 기업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기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법”이라며 “개정안은 기업 부담을 가중하는 것으로, 그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전문가들도 많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이날 논평을 내고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재계는 상법 개정 저지를 위한 로비와 반대여론 조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특히 전경련 산하 기관인 한경연이 전경련을 대신해 재벌 나팔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고 꼬집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집중투표제에 대해 이사의 임기가 3년이고 대부분 회사에서 시차임기제를 운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집중투표제를 의무화 해도 외부주주가 원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 또 감사위원 분리선임의 경우 의결권 제한 방식(3%룰)을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며, 외부주주가 추천한 이사가 이사회에 진출하더라도 이를 곧바로 경영권 위협으로 연결시키는 것 역시 무리한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시차임기를 적용하면 한 해에 감사위원을 전부 선임하기가 어렵고 주주들이 몇 년에 걸쳐 공동행동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외부주주는 이사 한두 명을 선임할 수 있을 뿐 경영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감사위원, 사외이사를 상법 개정안대로 선출한다고 (외부주주가)이사회의 다수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해외 사례를 보면 헤지펀드가 기업 (적대적)M&A를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며 “경제계 주장은 수구적인 아이디어로, (대기업에 대한)부정적 인식만 심어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정도의 지배구조 개혁도 안하겠다고 하면 재벌 기업들이 ‘황제경영’을 계속하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며 “과거 기득권에 집착해 변화를 안 하겠다는 아집을 버리지 않으면, 더 큰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에 직면할 것”이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