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59화)북학파의 개혁사상

“아흐 자아는 허울이고 / 타아는 본색이로다”

입력 : 2017-03-27 오전 8:00:00
한국학을 전공한 어떤 프랑스 교수는 ‘사대(事大)주의’에 해당하는 불어표현을 질문받자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없으므로 그에 해당하는 용어도 없다”라고 답했다. 과연 ‘제국주의 침략자’로서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에 그런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점이 강조된 ‘한일위안부합의’가 실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10억엔에 역사를 판 정부나, 그 정부의 수장이었던 대통령의 온갖 범죄에도 불구하고 탄핵무효를 외치는 사람들이 꾸준히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심리의 저변에는 미국이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친미사대주의’가 깔려 있다.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
<맹자>에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소국으로써 대국을 섬길 수 있다’(惟智者爲能以小事大) 하여 ‘사대(事大)’라는 표현이 나올 때만 해도 이는 약소국의 현실적인 외교전략이었다. 그러나 주자(朱子)를 신봉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대외정책으로 삼고 중국을 받들다 못해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여기면서 사대주의에 빠져있던 것은 ‘지혜로운 자의 외교전략’이 아니라, 영어나 불어로 번역할 때 쓰이는―적합한 용어가 없어 풀어서 설명되는―표현처럼, ‘노예근성의’ 정신이나 ‘아첨하는’ 태도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대체된 시대에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베트남에도 ‘소중화’의식이 있었으나, 일본은 곧 ‘중화’를 벗어나 오히려 중국을 침략하였고 베트남은 중화문명의 전파를 명분 삼아 인근 나라들을 정벌하고 군주들이 대내적으로는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였으니, 조선의 지배층만한 사대주의자가 있었으랴.
 
대청복수론(對淸復讐論)-북벌론(北伐論)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존주론(尊周論)이 17세기 조선의 국가통치이념이었으나 실학사상을 계승한 한 유파가 18세기 중엽 노론의 일각에서 나오니, 이가 바로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해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이루고자 한 북학(北學)파다.
 
몇천년 동안 우리는 중화의 변두리였다
우리의 동이
서융
북적
남만을 변두리로 한
한복판 중화야말로
천하의 본국이었다
그러나 천하는
어느 한곳만이 중심이 아니라
둥글둥글하여 지구였다
그 지구도 절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도
해동 소화가 아니라
어엿이 변두리가 아니라
조선 자체였다
 
이 역적의 선언이 홍대용으로 하여금 있었다
진작 북학의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더불어
주자학의 굴레 벗어나
조선에 과학의 용기를 드러냈다
 
< … >
(‘홍대용’, 5권)
 
담헌 홍대용은 1765년 북경에 가 서양 문물을 접하고 천문·지리·역사 등에 대한 지식을 쌓고 돌아온다. 그는 서구 과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학문연구에 있어 실증적·과학적 태도를 취했고 수학·천문·측량에 관한 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썼는데, 자신의 집에 천문대를 설치해 혼천의(渾天儀)로 천문을 관측했다고 한다. 담헌은 중화사상의 근간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부정하고 자신의 저서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지구지전설(地球地轉說)’을 주장했다. 지구는 둥글고 자전하며 우주는 무한하다는 과학적인 세계관은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고 모든 나라가 평등하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2015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북학 관련 자료를 모아 소개한 '탑골에서 부는 바람' 전시에서 참석자들이 홍대용에 대한 소개글을 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
북학파의 사상은 외적으로는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내적으로는 조선에서 진행되던 성리학의 철학적 논쟁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理)와 기(氣), 사람과 만물의 성(性)에 관한 주희의 논술로부터 야기된 복잡한 철학적 논쟁들이라 여기서 다룰 바는 아니나, 상황을 매우 단순화시키면 이러하다. 당시 노론 내에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졌는데, 사람의 성과 사람 이외의 존재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논하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가 주가 되었다. 낙론(洛論)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본성의 선함을 주장한 반면, 호론(湖論)은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과 기질의 발현을 강조했는데, 북학은 인물성동론에 기초하고 있었으므로 화이론(華夷論)적 세계관이 갖는 차별성과 위계질서를 ‘화이일론(華夷一論)’의 보편동일성으로 바꾸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학파가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위해 청나라 문물의 도입을 역설하고 대의명분론적인 ‘북벌’이 아니라 ‘북학’을 주장하였지만 주자학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근세 조선의 대문장 박지원이라
능히 평하고
능히 험하고
능히 강하고
능히 유하고
 
과연 연암 문장이라
< … >
 
사람도 걸출하거니와
문장도 탁월하거니와
천하 큰 바가 큰 그릇과 같도다
어찌 그것을 가질 수 있음인가
이렇게 말하였거니와
 
홍국영의 해코지 피하였거니와
정조 상감의 탄핵에 이르기를
근일 문풍이 이렇게 변한 바는
그 근본이 다
박지원의 죄라
글 하나 분부대로 순정한 것 바쳐
저의 목숨은 살아났거니와
 
법국에 서서에 루쏘 있거니와
조선에 연암 있어
오늘 대문장의 『열하일기』 읽는 도량이여
(‘박지원’, 9권)
 
연암의 동시대인으로, ‘서서(瑞西·스위스)’에서 태어나 ‘법국(法國·프랑스)’으로 건너가 활동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루소(1712~1778)를 지구 저편에서 소환해 연암과 비교하는 시인의 생각이 흥미롭다. 연암의 <열하일기>가 루소의 저술만큼 여러나라에 번역될 수 있었다면(2010년 일부가 영어로 번역되었다), 탁월한 필력을 가진 작가·대문장가이자 박학다식한 학자·사상가인, 또한 그림에도 재능이 있고(루소는 작곡을 했다) 인간적인 매력도 풍부했던 한 인물이 루소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18세기 지구의 저편, 한반도에서 찬연히 빛났음을 알았으리라.
 
“천하는 곧 천하 사람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다”(天下乃天下人之天下, 非一人之天下也, 연암집, 권14)라고 말한 박지원이 <호질>, <양반전> 같은 작품을 통해 양반사회의 횡포와 위선을 비판한다거나,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취해서 배워야 한다’(<열하일기>, 일신수필)는 공리적 사고를 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겠다. 그 역시 홍대용처럼 지구지전설을 주장하고 이용후생의 과학에 관심을 기울여, 청나라 연행 때 보았던 물레방아를 그림으로 그려와 후에 현감으로 일할 때 마을에 설치하기도 했다.
 
연암은 글쓰기에 있어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대문장가인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의 문체를 그대로 모방하는 풍조를 비판하는 한편, 신라나 고려의 좋은 풍속을 계승해 옛것과 새것을 결합하고 하층민이 사용하는 우리말을 통해 조선의 목소리를 담으려 한 주체성과 창의성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개혁적이고 창의성을 아낄 줄 아는 군주인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본보기로 연암의 <열하일기>를 문제 삼아 패관소품이라 칭하고 고전 문체의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한 것은 의아한 일이다. 물론 정조는 연암이 격식을 차려 쓴 ‘반성문’의 문장력에 감탄했다고 전해지지만.
 
초정(楚亭) 박제가(1750~1815)
초정 역시 담헌과 연암처럼 청나라에 다녀와, 청의 문물을 수용해 조선의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상업·유통 그리고 외국과의 통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수레·선박의 사용과 그 운용을 위한 도로·교량의 필요성도 강조되었다. 그가 자신의 저서 <북학의(北學儀)>에서 많은 실용적 정보들을 상세히 기록하며 중상주의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여러 선구적인 제안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비판받는 이유는, 중국 사행이 다른 이들에 비해 더 많았기 때문인지, 그리하여 청나라의 문명을 따라잡고 싶은 마음이 조급해져서인지, 지나치게 청에 경도되어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제안까지 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 실학의 실마리는
자아이다
그런데 조선 실학
박제가는
타아이다
 
우리나라 땅이 중국과 가깝고
우리나라 음성이 중국과 같도다
그러매 우리말을 다 내버린다 할지라도
안될 것 없도다
버린 뒤에라야
오랑캐라는 수치를 면하고
몇천리 땅이 두루
주ㆍ한ㆍ당ㆍ송의 기풍을 가질 것이로다
< … >
 
이런 타아를 전승하여 마지않으니
1930년 이광수
앞장서서
내 이름
내 넋 다 바꿔
일본인이 되자 하였다
 
1945년 10월
왕년의 수원 애국반장 키무라 마사히꼬
본명의 박우희로 돌아갔다가
미 군정청 민사처 간부로 되었다
민사처 조사과장
에드먼드 존 대위 이름 따다
에드먼드 팍이 되었다
아흐 자아는 허울이고
타아는 본색이로다
 
이제 알겠느냐 이 불쌍한 자아들아
(‘박제가’, 25권)
 
북학파가 노론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그들의 비판을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인지 혹은 사상의 원류가 그리로 돌아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북학파의 학자들은 이용후생의 실용주의와 실증적 과학사상으로 개혁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한계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비록 만주족(여진족)의 청이 정치적으로 중원을 점령하고 있다해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른바 ‘중화’의 후손들이고 그 땅에는 중화의 문화가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므로, 청에 내재되어 있는 중화의 문물과 청이 스스로 이룩한 선진 문물을 함께 수용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청의 정치적 야만성은 거부하되 문화적으로는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한다는 ‘문정분리론’의 태도는 실상 다시 ‘화이(華夷)를 구분 짓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더욱 발전해, 중화의 유법을 배우고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룬 후 청을 제압하자는 ’학화양이론‘으로 나아간다(전홍석, <조선후기 북학파의 대중관 이해>, 한국학술정보, 2006, 94-107쪽).
 
박제가가 중국의 선진문물의 수용에 몰두하느라 그 문화·문물과 비교해 조선을 비하하고 언어까지 버리려 한 극단적인 태도에서부터 고은 시인은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시기를 거치며 이어지는 새로운 ‘사대주의’를 주목해 이를 비판하고 있다. 중화사대주의는 이제 이 땅에서 친일, 친미사대주의로 이어져 그 어리석은 ‘위용’을 뽐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지난 25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과 서울광장 일대에서 탄기국 주최로 대통령 탄핵무효 국민저항총궐기 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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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