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지배구조 개편에 쫓기던 재계 기류가 다소 느슨해졌다. 관건이던 상법 개정안 처리가 불발되면서 한시름을 놨다. 재벌개혁 기치 아래 경제민주화 법안이 줄을 이었지만, 정당간 이견과 대선정국에 막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삼성, SK 등 지배구조 개편의 과제를 안은 기업들은 관망 체제로 전환했다. 다만, 5월9일 대선과 함께 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실현될 경우 경제민주화는 재등장할 것으로 보여 낙관은 어려울 전망이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의 3월 임시국회 처리가 무산되면서 사실상 대선 이전 처리는 불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촉박한 대선 일정 탓에 4월 임시국회 개원조차 불투명해졌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정경유착으로 촉발되면서 경제민주화 법안 발의가 쏟아졌으나 실제 법제화는 녹록지 않았다. 상법 개정안의 경우 지난 2월 4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전자투표제 의무화와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에 합의했으나, 이후 엇박자를 내며 결국 법제사법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했다. 민주당이 절충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렸으나 역부족이었다. 다중대표소송제의 적용 기준을 지분율 100%의 완전자회사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개혁입법 실적에만 급급하다'는 시민단체의 반발만 샀다. 재계 지배구조 문제의 최대 쟁점인 인적분할 시 자사주 활용 규제나 순환출자 금지 법안은 정당간 이견이 커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었다.
법제화가 돼도 1년 정도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효력이 생기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국회 처리가 무산된 현 시점에서 재계는 이미 상당한 시간을 벌은 셈이다. 앞으로도 법안 통과의 보장은 없다. 재계 관계자는 "재벌개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았음에도 법안 통과가 무산됐다"며 "자사주 규제 등 민감한 법안 처리는 더더욱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선진화법의 제동이 재계에는 최후의 보루로 작동했다.
상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되자 재계로서는 지배구조 개편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다. 지난달 24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삼성전자는 "검토 과정에서 지주회사 전환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이 존재해, 지금으로서는 실행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지주사 전환 가능성으로 들썩였던 주식시장에 찬물을 끼얹은 발언이었다. 이날 삼성SDS는 "금년 분할 계획이 없다"고 공시했다. 물류사업을 분할한 뒤 삼성물산에 합병하는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가 점쳐졌으나 올해 안에는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졌다.
장동현 SK 사장은 같은 날 주총에서 "SK텔레콤의 인적분할 관련 어떤 논의도 진행한 적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정기인사를 통해 SK와 SK C&C의 합병을 마무리하며 그룹의 옥상옥 문제를 해결한 박정호 사장을 SK텔레콤 대표이사로 앉히자, 시장에서는 인적분할을 위한 사전포석이라는 해석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SK와 SK C&C의 경우에도 합병 직전까지 계획을 부정했었다"며 "당장 실행 의사가 없다는 것이지, 중장기적으로는 어찌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달 21일 법사위가 파행되고 규제 리스크가 완화되자, 주총 발언들이 이어졌다"며 "주가 변동성을 확대시키는 요인을 차단한 채 당분간 정치권과 여론 동향을 지켜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삼성이 지주사 전환에 부정적 의사를 내비치자 글로벌 시장은 다시 냉랭해졌다. APG자산운용은 “(삼성전자가)사업 외적 부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경영진은 그동안 경주해 왔던 (지배구조)쇄신 노력을 중단하지 말고 추진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헤지펀드 엘리엇은 삼성전자에 지배구조 간소화를 주문한 바 있고, 한국에서는 재벌개혁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커지는 상황"이라며 "삼성전자의 기업가치도 저평가된 상황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출시하는 것과 함께 지배구조도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의 움직임을 보고 지배구조 개편에 착수하려 했던 현대차 등 다른 그룹들도 선제적인 체제 전환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현대차의 경우 주요 현안인 기존 순환출자 해소 법안이 자사주 규제 법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회에서 주목도가 낮았다. 여유를 갖고 체제 전환을 검토할 시간을 벌게 됐다. 다만, 이 같은 여유도 일시적일 뿐 대선 결과에 따라 기류는 또다시 요동칠 수 있다. 진보 성향 정당이 집권할 경우 재벌개혁을 비롯한 경제민주화의 요구가 재계를 한층 압박할 것이란 게 지배적 전망이다. 게다가 지주회사는 브랜드 로열티와 자회사 배당을 통해 안정적으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경영권 위협의 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재계로서도 매력적인 카드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