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전직 고위임원들이 법정에서 일제히 증언을 거부했다. 지난달 1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심리로 열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에서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 증언을 거부한 데 이어 26일에도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와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 등 소환된 전직 고위임원 3명이 모두 증언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날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 뇌물 혐의의 증인 신문이 무산되고 재판도 일찍 끝나고 말았다.
대한승마협회장을 지낸 박 전 사장은 삼성그룹의 승마지원 과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핵심 인물로 꼽혀왔다. 그렇지만 그는 재판이 열리기 3일전 사유서를 제출한데 이어 이날 실제로 증언을 거부했다. 26일 열린 재판에서는 황 전 전무가 "뇌물공여죄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느냐"는 특별검사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본인의 진술조서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진정성립' 확인 절차에서도 증언을 거부했다.
보도에 따르면 특검은 임대기 제일기획 대표나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 이영국 제일기획 상무 등이 증인으로 소환됐다가 불출석한 것까지 거론하며 이들의 증언거부를 비판했다고 한다. 과거 대기업 재벌총수가 연루된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이렇게 조직적으로 재판 절차에 협조하지 않은 선례가 없었다고. 실제로 SK의 최태원 회장은 증인으로 출석해 사실대로 진술했다. 그러니 삼성 사람들의 집단적인 증언거부는 참으로 유별나다고 아니할 수 없다. 특검도 지적했듯이, 삼성 사람들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드러낸 듯하다.
삼성 임원들의 증언거부 배경에 대해 특검은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감싸기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이재용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증언거부라는 것이다. 경위와 이유가 무엇이든 단순한 증언거부가 아니라 일종의 ‘법정태업’에 가깝다.
물론 현행 헌법과 형사소송법상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의 기본권으로 인정돼 있다. 따라서 삼성 고위임원들의 증언거부가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또 자신이 몸담았던 기업이나 기관의 일을 외부에서 스스로 발설하고 다니는 것은 상서로운 일은 아니다. 인간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때로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에 의해 증언해야 일이 있을 경우에는 정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시민의 책무이다. 이번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사건의 경우에도 안종범 전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은 그간 보고 겪었던 일들을 검찰과 법원에서 비교적 성실하게 진술하고 증거도 제시해 왔다. 경제학자인 그가 이번 사건에 연루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되도록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더 이상 국민의 지탄을 받지는 않는다.
사실 법에 대한 삼성의 무시와 경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게 삼성그룹 경영권을 넘겨주는 작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하면서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 때마다 삼성은 법망을 요리저리 피해나갔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정상적으로 사법처리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사법처리가 지연되거나 왜곡됐다. 급기야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이어 2008년 출범한 삼성특검이 수사를 하고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삼성특검 수사에서도 여러가지 의혹이 완전히 규명됐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처벌받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나중에 대부분 화려하게 복귀했다. 삼성은 금산분리를 위한 법을 어겼을 때도 당국으로부터 여러가지 ‘배려’를 받았다.
삼성 사람들이 법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는 그런 과정에서 형성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습관처럼 체질화된 것일지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삼성이 대한민국의 법을 멋대로 흔들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더욱이 그들의 ‘법정태업’이 현재 구속상태에서 재판받고 있는 이재용씨에게 유익한지도 스스로 되물어봐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과 특검의 조사와 압수수색을 모두 거부한 것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삼성 사람들의 ‘법정태업’은 자해행위일 수도 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였던 플루타르코스는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신이 측정한다고 썼다고 한다. 지금 법정에서 보여주는 삼성의 언행은 국민들이 측정하고 계산하고 있다.
차기태(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