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과 거래해온 중소기업은 구두계약 형태로 일감을 늘려받기로 했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은 자신들이 보유한 기술 솔루션을 공개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협의 과정에서 일감은 줄어들었다. 일감 중 일부를 대기업이 직접 맡기로 했다. 그 일에는 중소기업의 솔루션이 사용되는 것으로 의심된다. 중소기업의 것을 조금 바꾼 정도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가 보통 이런 식이다. 계약은 아직 체결 전이다. 중소기업은 이대로 계약 전체가 물거품이 될까 걱정하고 있다. 취재원으로부터 이런 얘길 들었지만 기사화는 어렵다. 불이익을 당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취재원도 기사를 바라고 한 얘기가 아니다. 단지 하소연할 데가 없을 뿐이다. 이런 제보는 처음이 아니다. 동반성장, 공정거래가 화두인 요즘에도 이런 일이 암암리 자행된다는 게 황당하게 느껴졌다. 눈속임이 가능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들통난다. 대기업의 자성이 필요하다.
어쩌면 처벌이 가벼워 그랬을지 모른다. 부당이익이 과징금보다 크면 눈앞의 이익만 좇게 된다. 최근 들춰진 대기업의 ‘갑질’ 사례가 많다. 그 피해는 누구 몫인지 특히 눈여겨봐야 한다. 오너리스크로 기업가치는 폭락했다. 주가하락으로 이어져 소액주주들에게 피해가 전가됐다. 운전기사들에게 상습 폭언을 한 종근당 회장은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거취는 함구했다. 경찰수사를 받지만 폭언만으로는 크게 처벌받지 않는다. 휴대폰을 던졌다는 운전자의 주장도 뒷좌석을 향해 던진 것으로 확인돼 폭행죄 적용이 어려울 듯하다. 폭언 녹취를 제공한 운전사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일부는 후유 장해를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매운동은 한 때다. 잊혀지기 마련이다.
크게 보면 갑질이 가능한 것은 힘이 집중된 탓이다. 경제력집중이 낳은 재벌의 갑질과도 연결된다. 힘이 넘치면 남용될 수 있다. 경제활동의 과실이 집중되도록 시장을 왜곡시킨다. 흔히 독과점 현상으로 나타난다. 시장이 독과점이 되면 그 속의 중소기업들은 종속된다. 재벌 회사들은 대부분 상품시장에서 독과점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원료·부품 시장에선 구매자로서 독과점적 지위를 갖는다. 상품시장에선 높은 가격으로 팔고 원료는 싸게 산다. 저임금이나 저리로 노동과 자본을 공급받는다. 갑질이 생기는 이유다. 이는 다시 경제력집중을 가중시킨다. 재벌 중심 경제체제가 만드는 악순환이다.
1980년 공정거래법이 도입된 이후 그 전보다 경제권력은 약해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경제력집중이 심화된 것은 계열사 수나 자산 등 각종 지표로 나타난다. 그 속에 정경유착이 드러났다. 경제단체를 중심으로 정치권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비자금 비리 적발이 반복되면서 국민의 한숨만 쌓여갔다. 대기업 총수들 사이에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사례가 드물 정도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일례다. 생겼다 폐지됐다 되풀이하다 결국에는 없어졌다. 전경련이 폐지에 앞장섰었다. 전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는 재벌이 힘을 보전하려고 흐름에 역행한 탓으로 보여진다. 시장경제가 글로벌화 돼 기업 지배구조는 국제기준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자면 규제나 처벌 강화를 통한 투명화는 필연적 수순이다.
상속세와 증여세 납부 등 규정대로면 재벌은 지속되기 어렵다. 상속으로 재산은 분할되고 지배력은 약해진다. 소유와 경영은 자연히 분리된다. 1800년대 후반 수많은 재벌이 출현했던 미국에서 지금은 재벌문제를 찾기 힘든 게 이를 방증한다. 오너리스크로 인한 주주 피해를 막기 위해 집단소송제, 징벌적손해배상제 등 제도적 뒷받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는 또다시 국정농단 같은 문제가 생긴다. 대기업이 경영 투명화를 피할 수 없는 과제로 인식하고 갑질이 존재하지 않는 선진 기업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가길 기대해본다.
이재영 산업1부 재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