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원숭이 재판

입력 : 2017-09-05 오전 6:00:00
나는 전형적인 ‘수포자(수학 포기자)’였다. 수학에 자신 없어 문과를 선택했고, 문과에서 소화해야 하는 수학조차 절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지금도 ‘미분에서 길을 잃고, 적분에서 책을 덮었다’라는 말로 비루했던 고교 시절을 회고하곤 한다. 수학만 그랬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으리라. 수학 못 하면서 과학 잘한다고 양심불량자로 손가락질받는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과학도 멀리했다. 수학이 과학의 언어라는 사실을 훗날 알았지만, 당시 과학은 암기과목에 가까웠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냥 공부를 못했다.
 
이런 수포자와 과포자(과학 포기자)에게도 기억나는 수업이 있다. 바야흐로 고1 지구과학 시간이었다. 과학 선생님은 비좁은 칠판에 태양과 지구를 나름대로 크기와 거리에 비례해 그리며 태양계를 설명했다. 우주의 그 광활한 크기와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쉽게 알려주려고 애썼지만, 과학 선생님의 그런 뜻이 성공했던 것 같지는 않다.
 
열변을 토하시던 선생님은 문득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리던 학생들을 보던 선생님의 표정에는 문득 좌절감과 슬픔이 스쳤다. 분필 가루 날리던 칠판 앞에서 선생님이 자조하듯 남긴 그 수업의 마지막 대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긴 너희가 우주와 지구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를, 그 신비하고도 심오한 세계를 어찌 알겠냐.”
 
돌이켜보면 고개라도 끄덕거리지 않은 게 죄송하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그 교실에 있던 더벅머리 친구들은 무죄다. 어쩌겠나. 몇십 억 년 전에 벌어진 일보다 몇십 분 점심시간에 먹을 도시락 반찬이 더 궁금했던 시절이었는데. 당연히 그 과학 선생님에게도 죄가 없다.
 
하지만 20세기 초 미국이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1925년 미국 테네시주의 한 공립학교에서 과학 교사 토마스 스콥스가 체포된다. 혐의는 ‘버틀러 법(Butler Act)’ 위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많던 테네시 주의회가 그해 통과시킨 법이다. 버틀러 법은 “테네시주 모든 공립학교에서 교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인간이 신성한 창조물임을 부인하는 이론을 가르치고, 인간이 하등동물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는 일은 법에 어긋난다”라고 규정했다.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라는 거다.
 
스콥스 교사 재판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이목이 쏠린다. 피고인 스콥스에서는 클러랜스 대로, 검찰 측에서는 윌리엄 브라이언 변호사가 법정 대리인으로 나서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인다. 그중 한 대목이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라고 보나요?(대로)” “천지창조에 따르면 약 6,000년 정도 됐습니다(브라이언).” “석기시대를 제외하더라도 이집트나 중국의 문명은 6,000년 이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이 지구를 6일 동안 창조했다고 믿나요?(대로)” “성경에서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수백만 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브라이언).”
 
‘원숭이 재판’으로 불린 이 재판에서 스콥스 교사는 유죄(벌금 100달러) 판결을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패배였다. 브라이언과 ‘창조론’은 재판 내내 조롱거리가 됐다. 이제 창조론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사라졌지만 창조과학, 혹은 지적설계론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과학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창조과학이 왜 과학이 아닌지, 창조과학을 믿는 인물이 왜 장관이 되면 안 되는지 많은 전문가와 과학자가 이미 지적했다. 더 이상의 첨언은 사족이다. 다만 왜 유독 현 정부의 과학 분야 인사에만 ‘감동’이 없고 논란만 보이느냐는 지청구에는 나도 목소리를 보태야겠다.
 
수포자이자 과포자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런 과학 선생님 같은 분은 아니더라도 90년 전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었던 브라이언 같은 사람을 장관 후보자로 임명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왜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다른 내각처럼 능력과 철학과 스토리를 겸비한 인물을 찾지 못할까? 정녕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못 찾기 때문인가. 있는데 외면하기 때문인가.
 
빨리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면 훗날 사람들은 지금의 논란을 훗날 이렇게 조롱할지 모른다. ‘원숭이 인사’라고.
 
김형석 <과학 칼럼니스트·SCO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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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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