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한영 기자]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핵·미사일 문제를 놓고 북한과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정부 출범 후 미국이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북한과 회동할 수 있다는 공식적인 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틸러슨 장관은 12일(현지시간) 미 워싱턴 D.C.에서 열린 '환태평양 시대의 한·미 파트너십 재구상' 토론회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그냥 만나자. 당신(북한)이 원하면 우리는 날씨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며 “그리고 나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갈지를 다룰 로드맵을 펼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미가 일단 의제 없이 가벼운 형식으로라도 첫 대화를 시작하고, 점차 핵·미사일 문제 등을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그간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해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피력해 왔다.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한이 60일 간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면 북·미 대화를 재개할 필요가 있다는 신호”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북한이 지난달 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을 발사하며 대화 분위기는 수그러들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핵무력 완성’ 선언까지 한 가운데 나온 틸러슨 장관의 발언은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문제에서 중요 주체인 중국의 지지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수차례 "북미 간 어떤 접촉과 대화라도 우리는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내왔다.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대북 추가제재 필요성을 제기할 때는 관영매체 등을 통해 "효과가 없다"며 '쌍중단(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 주장을 반복해왔다. 이에 대해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대사는 최근 “북한과 미국이 중국의 쌍중단을 고려하고 대화·협상으로 북핵문제를 유도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미국의 대화제의가 이뤄질 경우 북한의 반응도 주목된다. 핵무력 완성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화 테이블에 나올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미 북한은 지난주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 방북 시 “유엔과 다양한 급에서 왕래를 통해 의사소통을 정례화하겠다”고 밝혔다. 14·15일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안보협력이사회(CSCAP) 총회에 최진 북한 외무성 산하 평화군축연구소 부소장 등 북측 인사가 참석 예정인 가운데 이 자리에서 북미 접촉이 이뤄질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북미대화를 필두로 주변국 사이에 대화국면이 형성될 경우 60여일 앞으로 다가온 평창동계올림픽을 한반도 평화를 다지는 기회로 만들겠다는 우리 정부의 의지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한미 양국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위해서 입장을 같이 하며 노력하고 있다”며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된다면 다양한 방식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정부는 12일 제288차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에서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평창특별전 개최를 위해 남북협력기금 14억원을 지원하기로 의결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중 지난 10년 간 남북이 공동발굴한 고려 황궁 개성 만월대 출토 유물을 전시하는 내용이다. 백 대변인은 “평창 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실현하는데 기여하는 문화 행사”라고 설명했다.
다만 한반도 대화분위기 조성을 낙관할 수 없다는 신중론도 있다. 우선 틸러슨 장관의 발언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어느정도 교감한 후 나왔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지난 10월 틸러슨 장관이 북한과 2∼3개 대화채널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한지 하루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꼬마 리틀맨(김정은)과의 협상 노력은 시간 낭비"라고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불협화음을 이유로 틸러슨 장관의 경질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최한영 기자 visionch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