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재주소년' 음악에서 ‘소확행’을 읽다

‘청춘 기억’을 조립한 새 EP ‘From me to you’
“노래하는 즐거움, 작지만 탄탄한 내 삶의 행복”

입력 : 2018-02-27 오후 6:08:49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인디씬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를 가득 메우는 대중 음악의 포화에 그들의 음악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22일 오후 4시 서울 서교동의 한 스튜디오를 찾는 길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살며시 들렸다. 바람은 꽤 매서웠지만 오랜만의 영상 5도, 제법 봄 다운 햇살이 고즈넉한 골목길 구석 구석을 쓰다듬고 있었다. 세탁소에서 한 보따리 옷을 이고 나오는 동네 아주머니, 빵집에서 빵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여고생들, 공놀이를 하며 뛰어 노는 소년들. 서교동 골목 한 귀퉁이의 느리게 흘러가는 일상 풍경은 그 날의 날씨와 제법 조화로웠다.
 
그리고 그 한 켠에 위치한 스튜디오 ‘기프트(Gift)’에서 동네 분위기와 묘하게 닮은 뮤지션 '재주소년(박경환)'을 만났다. 15년 간 포크 뮤지션으로 진솔한 일상의 이야기를 ‘멜로디를 붙인 일기장’처럼 그려온 그였다. 지난 9일 새 EP 앨범 ‘프롬 미 투 유(From me to you)’를 발매하고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와 새 앨범의 작업기, 신곡의 의미, 음악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눠봤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포크 뮤지션 재주소년(박경환). 사진/에프터눈레코드
 
그는 새 앨범이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만들어 졌다고 설명했다. 미리 ‘콘셉트’를 정하고 작업하던 기존의 흐름과 정반대의 방식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뮤지션들과 음악을 했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과거 습작들을 하나, 둘 찾아보게 됐다. 일련의 곡들을 다듬어 모아보니 ‘청춘’, ‘기억’이란 점에서 공통성이 있었다.
 
“오랜 시간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보니 이제는 음악 자체가 제 일상이 된 것 같아요. 주변의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신곡을 만들거나 기존 곡들을 편곡하곤 하거든요. 이번 작업에는 기타에 멤버 유상봉, 제 아내인 이사라, 신인 뮤지션 이석원 군이 참여했어요. 아! 이석원씨는 언니네 이발관의 그 분은 아닙니다. (웃음)”
 
재주소년의 박경환이 지난 9일 발매된 새 EP 앨범 '프롬 미 투 유(From me to you)'를 들고 있다. 사진/애프터눈레코드
 
앨범 구상단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인 뮤지션 이석원의 ‘스물을 넘고’를 듣고 막연히 함께 싱글을 내보자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니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청년의 인생 넋두리에 자신의 과거 모습이 겹쳐졌다. 꿈을 좇지만 좌절할 때면 방황하고 허탈해하던 모습이, 연애하던 시절 함께 음악 작업을 하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 ‘스물을 넘고’ 작업에서 모든 게 시작됐어요. 석원 군과 함께 곡을 만들면서 제 20대 때의 기억이 빠르게 소환됐고 조립됐습니다. 당시의 느낌을 담아 만들었던 두 곡(‘프롬 미 투유’와 ‘이사’)을 다시 꺼내 수정하고 보완했더니 미니앨범으로 ‘어엿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앨범으로 내게 됐어요.”
 
‘스물을 넘고’는 이석원과 재주소년이 함께 하는 ‘인생 나눔’이다. 1절에선 10대 때 실용음악 입시로 고민한 석원이 20대가 된 지금도 인생의 무게를 느끼고 있음을, 2절은 이를(1절을) 들은 재주소년이 30대가 된 지금에서 타성과 허탈감을 노래한다. 해결책을 찾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상황을 두런 두런 나눔으로써 노래하는 ‘작은 행복’을 공유하고 전한다.
 
‘이사’는 이사라와 음악을 함께 만들었던 20대 때의 추억을, ‘프롬 미 투유’는 아내와 혼성 듀오를 만든다면 함께 할 활동 이름으로 ‘비틀스’의 곡명에서 따온 곡이다. 과거를 긍정하는 그의 삶의 태도에서 ‘소확행(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일상의 행복을 일컫는 신조어)’이 읽혔다.
 
앨범 커버에도 20대 때 그의 기억이 묻어 있다. 그의 배우자이자 뮤지션 이사라의 결혼 전 작업실 풍경. 사진/에프터눈레코드
 
기존 앨범에서 기타음이 주가 되는 ‘포크’ 장르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시티 팝’ 장르로의 변화도 꾀했다. 트럼펫과 신디사이저, 무그 등의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리들이 기존 앨범의 사운드와 차별점을 이룬다. 곡 구성에서도 ‘프롬 미 투 유’와 ‘Outro’는 한 곡임에도 1번 트랙과 4번 트랙으로 분할해 넣는 독특한 시도를 차용했다. 그는 “밴드 긱스나 마이언트메리처럼 트랙을 분할해 이것 저것 연주하는 재미와 에너지를 담으려했다”며 “Outro는 연주자들과 재밌게 ‘즉흥연주(잼)’식으로 녹음한 곡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여러 실험이 도입된 앨범이긴 하나,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회고적으로 풀어간다’는 점에선 15년 간의 음악적 흐름이 일관되는 측면도 있다. ‘귤’과 ‘명륜동’ 같은 기존 곡들의 일상의 분위기는 이번 앨범에서도 그대로 풍겨져 나온다. “저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멜로디와 선율을 담아 쓴 ‘일기장’ 같은 느낌이 있던 것 같네요. 굳이 사랑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할 이야기들은 많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청자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합주가 끝난 후 재주소년의 밴드 셋 세팅 모습. 사진/에프터눈레코드
 
앨범 발매를 맞아 지난해에 이어 전국 투어도 계획 중이다. 일단 다음달 3일 서울 강남 마리아칼라스홀에서 밴드 셋으로 단독 공연을 연다. 신곡 외에 재주소년의 히트곡들을 기타와 목소리 만으로 선보이는 어쿠스틱한 무대도 펼쳐진다. 4~5월 중에는 전주와 부산, 대구, 목포, 광주 등 6개 도시에서 공연도 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밴드를 유랑하기로 했으니, 재주소년을 ‘여행지’에 빗대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시적인 표현”이라며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그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고 답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지난날의 재주소년을 얘기하자면 한 겨울 눈이 엄청 쌓여서 갇혀버린 여행지. 따뜻한 집안에서 창밖으로 설경을 보며 방안에서 두런 두런 얘기하는 느낌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이번 앨범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이미지가 떠올라요. 한 여름 바다에서 친구들과 여유롭게 물장난하고 노는 여행지. 아마도 합주 멤버들과 ‘잼’을 하는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 아닐까 싶네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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