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영 정치부 기자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18일, 광복군 일행을 포함해 22명을 태운 미 공군 C-47 수송기가 중국 시안을 출발해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비행기 주위를 착검 상태의 일본군 병력과 전차가 둘러쌌고,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비행기는 다음날 중국으로 돌아갔다. 광복군 대위였던 장준하 선생은 책 <돌베개>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우리는 다시 탑승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체념의 눈을 감았다.” 3개월 간 미군 전략첩보대(OSS)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계획까지 세웠지만, 예상보다 빠른 일본의 항복으로 무위에 그치면서 빚어진 일이었다.
해방 초기의 혼란 속 우리 군 수뇌부를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차지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과 김홍일 장군, 백범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 등 광복군 계열은 소수였다. 이는 국군이 두고두고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는 빌미가 됐다.
해묵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부도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지난해 9월 독립군·광복군 관련 역사를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내린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그 결과 지난해 말 독립군·광복군 역사가 국군의 뿌리임을 인정하는 단행본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이 발간됐다.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객관적 사료를 중심으로 정리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다른 가시적인 조치도 하나 둘 이뤄지는 중이다. 육군은 지난달 1일 육군사관학교 교정 내에 독립전쟁 영웅 5인(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이회영)의 흉상을 설치했다. 흉상 중앙 표지석 상단에는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의 가사도 새겨넣었다. 박일송 육군박물관장(대령)은 “우리 군은 의병과 독립군·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샤를 드골이 이끈 자유프랑스군이 프랑스 수도 파리를 탈환한 것과 같은 결과물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광복군의 독립운동 노력은 군 내부에서 충분한 공감대가 있는 듯하다.
선조들의 독립운동 노력을 기리는 것은 우리 사회 내 보수·진보 간 갈등을 떠나 우리 사회 내 올바른 가치관 정립을 위해서도 필수다. 이제 남은 과제는 독립군·광복군 역사를 우리 군 역사에 어떻게 편입시킬지와 ‘국방사’ 수록 여부다. 현재 10월1일인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변경하자는 주장도 언젠가는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할 사안이다. 군 내 치열한 내부논의를 통해 결과물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오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을 앞두고 든 단상이다.
최한영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