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홍연 기자] '재판거래' 등 사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법원행정처가 지난해 10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PC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하드디스크와 같은 저장장치에 저장된 정보를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하여 복구할 수 없도록 완전히 지우는 기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는 '법관 블랙리스트' 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시기로, 의도적인 증거인멸일 가능성이 커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신자용)는 26일 "양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컴퓨터가 지난해 10월 디가우징 됐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며 "당시는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돼 2차 조사가 곧 착수될 시점이기에 디가우징 경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박 전 처장의 PC 역시 디가우징 됐다"고 밝혔다. 이날 법원행정처는 A4용지 3~4박스 분량의 관련자료를 검찰에 제출해다. 그러나 "현재 제기되고 있는 의혹과 관련성이 없거나 공무상 비밀이 담겨있는 파일 등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다"면서 하드디스크는 제출하지 않았다.
제출 자료를 1차 검토한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재판거래 시도와 판사 사찰 등과 관련해 대법원이 제출한 410개 파일의 원본 등에 대해서도 증거능력이 없다며 하드디스크 원본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제출받은 출력본은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작성자가 자기가 작성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형사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며 "대법원 판례가 요구하는 증거능력 요건을 감안할 때 진실규명을 위해 요청한 자료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추출된 자료만 가지고 검찰이 결론을 낸다면 누구도 결론을 수긍할 수 없을 것"이라며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객관적 자료를 많이 확보해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하드디스크 등 핵심 자료 제출을 계속 거부할 경우 강제수사로 전환할 가능성도 내비쳤다.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장이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서 법원의 입장을 존중해 자료 임의제출을 요청했던 것"이라며 "하드디스크 등 증거능력이 있는 핵심 증거를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법원행정처 측은 규칙대로 처리했다는 입장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법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퇴임으로 관련 규정('전산장비운영 관리 지침' 및 '재산관리관 및 물품관리관 등의 지정에 관한 규칙')과 통상적인 업무처리 절차에 따라 디가우징 등의 처리 후 보관하고 있다"며 "대법관 뿐만 아니라 일반법관이나 직원이 사용한 PC도 불용품 처리는 디가우징을 거친다"고 말했다. 다만, 검찰이 강경입장을 보이자 법원행정처는 "하드디스크의 임의제출 가능성은 열려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검찰이 강제수사 카드를 꺼낼 가능성은 커졌지만 현실화 될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은 "압수수색을 진행하려면 범죄가 소명돼야 한다. 하지만 현재 피의자나 참고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법원행정처의 자료 제출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진녕 전 대한변협 수석 대변인도 "압수수색을 청구할 수 있다는 취지이지 당장 청구하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여론 추이를 지켜볼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난 2017년 6월1일 퇴임한 박병대 당시 대법관(오른쪽)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친 후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홍연 기자 hongyeon1224@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