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법원종합청사 동문을 지나 왼편을 보면 '국민을 위한 법원·국민과 함께 하는 법원'이라 새겨진 표지판이 보인다. 밑에 게시돼 법조계 행사를 알리는 여러 현수막은 시간이 지나면 교체되지만, 이 글귀는 굳건하다. 법원 스스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재판 당사자인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은 '법원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대명제에 찬물을 끼얹었다. 법원행정처가 재판을 정부와의 흥정거리로 삼으려 한 문건이 발견되며 '재판 거래'라는 말까지 나왔다. 사법부가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리라 의심치 않던 재판 당사자, 곧 국민은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분노했다. 검찰 수사는 자명한 순서였다.
검찰이 법원을 수사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상황 진척은 더디다. 대법원은 이미 자료를 삭제했다며 핵심 증거인 양 전 대법원장 하드디스크 등을 검찰에 내지 않았다. 추가 증거 제출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일단 자료를 다 달라는 검찰과,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안 낸 것은 아니고 수사 관련 없는 부분은 빼야 한다는 법원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최근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하창우 당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뒷조사한 의혹까지 나왔다. 하 전 회장은 양 전 대법원장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했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눈엣가시'였던 하 전 회장의 '약점'을 찾는 방안을 문건으로 작성했다. 대한변협은 "법원이 법조삼륜 한 축인 대한변협을 길들이려 했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처음 이번 사태가 불거진 뒤 한 법원장은 "재판 거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밑의 사람들이 윗사람을 위하려는 과도한 마음에서 한 일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한 지방법원 일선 판사도 "문건 작성 자체는 정말 잘못된 일"이라면서도 "'재판 거래'는 현 시스템에서 있을 수 없다. 사법부 힘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쏠리는 분위기 속에 내부 구성원들이 이에 따라갔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법원은 문건 작성을 재판 거래와 곧바로 연결 짓는 것을 억울해한다. 정작 국민을 위하고 함께 한다면서 '이런 것까지 건드려야 했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혹의 늪에 더 깊이 빠지고 있으면서 말이다. 여전히 국민을 앞세우는 사법부를 국민은 '양치기 소년' 보듯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은 엄정한 수사로 밝혀질 것이다.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이번 의혹을 보면 갈수록 검찰 강제수사에 명분만 더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법원이 자초한 일이다.
김광연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