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다양성은 발전의 자양분

입력 : 2018-07-17 오전 6:00:00
지난 한 달간 우리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2018 러시아 월드컵은 프랑스의 우승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어느 스포츠 경기가 팬들을 흥분시키지 않겠냐마는 월드컵만큼 남녀노소와 직업을 망라하고 우리 모두를 열광케 하는 경기도 없을 것이다. 이번 월드컵은 인구 400만 명의 작은 나라 크로아티아가 결승에 올라 더욱 화제가 되었다. 축구가 강대국들의 전유물이 절대 아니라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결승전이 끝나고 시상식에서 양국 선수들과 감독, 대통령들이 보여준 감동적인 장면들 또한 월드컵이 결코 내셔널리즘(애국주의)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 통합의 이벤트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축구 강국이어야 대국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사고로 축구처럼 소박한 운동을 너무 사치스럽고 과도한 경쟁으로 몰고 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 피날레는 적어도 이런 현상과는 거리가 먼 화합의 장으로 기쁨이 넘쳐났다.
 
월드컵은 프랑스의 축구 지도자이자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을 역임한 쥘 리메(Jules Rimet)가 1928년 창설했다. 리메는 피에르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이 만든 올림픽에서 영감을 얻어 전 세계 축구 가족을 한데 모으기 위해 월드컵을 제안했다. 최초의 월드컵은 우루과이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1930년 7월30일 남아메리카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우승컵도 아르헨티나를 꺾은 개최국 우루과이에게 돌아갔다.
 
자국에서 열린 1998년 대회 후 20년 만에 월드컵을 탈환한 프랑스 팀은 이번에도 다양한 인종의 선수들로 구성돼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 축구는 이민과 관계가 깊다. 초기에 프랑스에서 축구는 거의 이민자들이 하는 놀이였다. 영국해협에 면한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 영국 상인들이 둥지를 틀고 축구를 시작했다. 그 후 프랑스의 영어 선생님, 영문과 교수들이 축구를 했다.
 
<파이팅 프랑스! 축구와 이민, 교차한 역사>라는 전시회를 주최한 민속학자 파브리스 그로네(Fabrice Grognet)는 “처음에 그랑제꼴(엘리트학교)에서 축구를 했다”고 설명한다. ‘축구는 영국에 심취한 사람들과 함께 왔다’고 설명한 그는 “이(축구)는 영국의 교육과 관계된 것으로 유럽인들에게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축구의 현대화는 영국에서 구현되어 프랑스에서 영국 교육, 특히 영국 대학모델을 모방한 것이 시작이다. 모든 프랑스의 엘리트들은 축구에 관심이 많았고 감성적이었다”고 덧붙였다.
 
1872년에는 프랑스 최초의 축구클럽 르 아브르 에프세(le Havre F.C.)가 창설되었다. 점차 시합이 많아지면서 외국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그 수는 한정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이 규제는 계속되었다. 외국 선수들의 유입은 국내 젊은 선수들의 탄생에 제동을 건다는 이유였지 인종차별 차원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흑인 선수들은 프랑스 식민지인 까닭에 외국인으로 간주되지 않아 각 클럽은 식민지 출신들을 많이 기용했다.
 
1966년 전후로 한 클럽에서 활약하는 외국 선수는 2~3명으로 한정되었지만, 2000년대 들어 유럽 축구클럽들은 이 제한을 없앴다. 축구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외국인에게 개방한 것이다.
 
세네갈 출신 라울 디아뉴(Raoul Diagne)는 프랑스 팀 최초의 흑인선수로 1938년 12월4일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했다. 모로코 출신 라르비 벤 바렉(Larbi Ben Barek)은 프랑스의 <흑인-백인-마그렙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팀에서 활약했다. ‘축구계의 나폴레옹’으로 불렸으며 1958년 월드컵 스타였던 레이몽 코파(Raymond Kopa)는 폴란드에서 이민 온 광부 집안 출신이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프랑스 국민영웅이었던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 또한 이태리 이민자의 아들이다. 로베르 피레스(Robert Pires)도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이다.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 역시 1972년 마르세유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알제리에서 이민 왔다. 이번 월드컵 스타 킬리안 음바페(Kylian Mbappe)도 카메룬에서 이민 온 가정 출신이다.
 
이처럼 프랑스 축구 역사는 이민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이 다양성이 20년 만에 월드컵을 다시 탈환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다양성의 이점을 보려하지 않은 채 프랑스 흑인 축구선수들을 ‘연탄’이라고 희화화하고 모욕하는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은 좀 더 개방된 사고로 세계를 보는 매너를 익혀야 한다. 1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월드컵은 극도로 세련되어 가는데 관중들은 아직도 인종차별주의에 젖어있다면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축구 선수들의 기량이 세련된 만큼 관중들도 세련되어야 월드컵은 영원할 수 있다. 세계 최강의 독일을 이기고 돌아온 한국 축구단에게 계란을 던지고 야유한 몰지각한 대중들은 프랑스 축구에서 다양성과 관용의 미덕을 익히기 바란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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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