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태현 기자] 서울시가 저시력 장애인을 위해 버스 전면부 디자인을 바꿨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저시력 장애인과는 소통도 제대로 이뤄지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일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시는 8월 초쯤부터 ‘저시력 장애인 버스 이용 편의를 위한 버스 번호판 개선’ 시범사업을 시내버스 240대에 적용했다. 해당 노선은 101번·441번·3313번·3315번 등으로, 노후 차량을 신형 차량으로 교체할 때 사업 대상으로 삼았다.
시내버스 전면부 상단의 행선지 글자를 가느다랗게 바꾸는 내용으로, 저시력 장애인이 동그랗고 두꺼운 글씨를 판별하는데 지장이 있어서 사업을 시행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행선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장애인들의 민원이 빗발쳤다는 점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저시력 장애인을 위한 사업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일부 악성 민원인들이 수긍하지 않으려 한다"며 "올해 말까지 지켜보고 사업 지속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단 악성 민원인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불편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지하철 잠실역 근방 정류소에서 시민 김모씨에게 3313번의 행선지를 알아볼 수 있는지 물었더니 눈을 찌푸리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김씨는 "장애인을 위한 사업이라곤 하지만, 비장애인 입장에서는 식별하기 힘들고 불편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저시력 관련 단체들도 서울시 정책에 시큰둥한 분위기다. 일단 한결같이 이번 사업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는 입장이다. 심지어는 이번 정책의 계기가 된 협의회에 참석한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16년 4월과 11월 두 차례 열린 장애인이동권협의회는 장애인 단체 관계자 10여명, 외부 전문가, 공무원 등 25명 정도의 모임이었다.
당시 시각장애인 대표로 참여한 김성은 중구길벗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버스 번호를 확대하는 등 눈에 띄도록 전면부를 개선해달라고 말한 바 있다"며 "서울시는 그 때 회의만 하고 이후 전혀 연락도 없으니, 내 위원 활동이 종료된 건지도 모르겠고 이번 정책도 전혀 몰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은 '협의회 열심히 해서 서울 전역에 장애인·이동약자가 편하게 다니는 선진국형 교통시설을 만들겠다'고 큰 소리쳐놨는데, 서울시는 여태 연락도 없다"며 "눈이 아예 안 보이는 전맹 의견이나 중요하게 여기지, 저 같은 저시력 장애인은 묻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시력은 양쪽 눈의 최대 교정시력이 0.04∼0.3이거나 시야각이 30도 이내인 경우 등으로, 일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증세를 뜻한다. 확대경 등 보조기구를 이용해도 1m 이내에 있는 글자를 읽는 식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따르면, 저시력 중 70%는 버스 번호 같이 큰 글자도 5m 이내에 들어와야 식별하며 나머지는 10m 이내다. 한국에도 50만명 가량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전맹보다 시각장애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다.
소통 문제뿐 아니라 정책의 실효성 역시 별로 지지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김 소장은 "글씨의 크기가 문제지 굵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예를 들어 버스 번호가 전면부 위쪽 귀퉁이에 있는데, 위쪽 전체를 덮도록 바꾸는 게 이번 정책보다 낫다"고 말했다.
김대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서울지부 사무처장도 "저시력 중 녹내장은 가느다란 글씨가 더 좋을지 몰라도, 백내장과 망막색소변성은 두꺼워야 좋다"며 "도착할 때 버스 번호 불러주는 안내방송이 더 낫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미영순 한국저시력인협회장 역시 "안내 표지판도 바싹 들러붙어서 봐야하는 등 불편 때문에 저시력 장애인은 버스 자체를 엄두 못내는 경우도 많다"며 "버스 타는 자체가 익숙치 않은 마당에 글자를 바꾼다고 해서 체감이 잘 안된다"고 말했다.
취재가 시작되서야 서울시는 장애인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나섰다. 연말에 장애인이동권협의회 위원들을 모아 협의회에서 제시된 정책들의 추진 경위를 설명하고 논의할 계획이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지하철 잠실역 8번 출구 정류소에서 시민들이 3313번 버스를 타고 있다. 사진/신태현 기자
신태현 기자 htenglis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