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정기종 기자] 연초 글로벌 제약업계는 또 한 건의 초대형 인수합병(M&A)에 집중했다.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이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이 팔리는 의약품 '레미블리드'를 보유한 세엘진을 약 730억달러(약 83조원)에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번 빅딜로 지난 2017년 글로벌 13위 매출 제약사였던 BMS는 단숨에 5위권에 해당하는 초대형 공룡으로 발돋움했다.
이 같은 빅딜은 BMS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5월에는 일본 다케다약품공업이 70조원에 달하는 금액에 샤이어를 인수하며, 일본 기업 전체 M&A 최대 규모 기록도 갈아치웠다. 다케다의 샤이어 인수는 글로벌 제약업계 연혁에서도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다케다뿐만 아니라 연초부터 이어진 굵직한 계약에 글로벌 제약업계 M&A 규모는 지난해 1분기에만 130조원을 달성했다. 3분기 누적으로는 200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0% 가까이 커졌다. 특히 2000년대 평균 8억달러(약 9000억원)이던 건당 계약 규모도 최근 3년간 15억달러(약 1조7000억원) 수준으로 두배 가량 늘었다.
이 같은 흐름은 BMS의 빅딜 소식과 함께 올해까지 이어지는 분위기다. 최근 두달새 200조원 규모의 M&A가 체결됐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전 세계 최대 제약·바이오 IR행사 '2019 JP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의 화두도 M&A였다. 매년 450개 이상의 기업에서 9000여명이 참석하는 만큼 차기 대형 M&A 체결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 상황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앞다퉈 M&A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신규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현재 상위 글로벌 제약사들은 대부분 굵직한 블록버스터 의약품을 보유하고 있다. 연매출 20조원이 넘는 글로벌 1위 의약품 '휴미라'를 보유한 애브비를 비롯해 세엘진의 혈액암 치료제 '레블리미드', 화이자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엔브렐' 등 상위 10개 매출 품목은 해마다 각각 6조원 이상을 거둬들이며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의약품도 특허만료가 존재한다. 특허만료 이후엔 복제약들이 시장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만큼 매출 손실도 발생할 수 있다. 시장 절대 강자 휴미라도 지난 4분기 유럽 시장에서 전년 동기 대비 17.5% 감소한 매출을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특허만료에 따라 휴미라 바이오시밀러들이 대거 시장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의약품 탄생을 위해 필요한 기간과 비용은 최소 10년, 1조원 이상이 필요하다. 그 이상의 자원을 투입한다고 해도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최종 승인까지 성공에 이를 확률은 0.02%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세계 무대에서 손에 꼽히는 지위를 누리고 있는 제약사라 해도 모든 파이프라인을 자체 개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글로벌 제약공룡들이 선택한 것이 M&A다. 기술력을 보유한 유망 바이오벤처의 초기 연구물을 회사와 함께 사들임으로써 신약 개발 기간과 비용을 대폭 절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소규모 벤처기업만 피인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케다가 인수한 샤이어나 BMS 품에 안긴 세엘진의 경우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제약사였지만 흡수됐다. 해당 경우는 인수 주최가 되는 제약사가 가지지 못한 파이프라인을 보강하는 포트폴리오 강화전략의 일환으로 비친다. M&A를 통해 다케다는 샤이어의 강점인 희귀질환치료제 분야를, BMS는 세엘진의 항암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게 됐다.
제약업계의 공격적 M&A 행보는 신약 개발을 촉진해 환자 치료옵션 확대와 산업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린다. 문제는 대형 제약사들 중심으로 이뤄지는 합종연횡에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떨어지는 국내업계가 뒤처질 수 있다는 점이다. 600여개 전체 제약사 중 상장 기업이 10% 수준에 불과한 국내 제약산업 규모도 연간 21조원 수준으로 글로벌 시장에 비하면 초라하다. 지난 2017년 매출 1조원이 넘는 기업은 유한양행, GC녹십자, 광동제약 단 세 곳뿐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 제약산업의 2% 수준에 불과한 규모를 지닌 국내업계가 꾸준한 기술투자를 바탕으로 해외무대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상황에서 대형사들의 연쇄적 M&A를 통한 규모의 경제화는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라며 "연이은 기술 수출 등의 성과를 내고 있지만 국내업계 역시 M&A를 통한 외형 불리기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정기종 기자 hareggu@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