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음악이 서슬퍼런 '정치 권력'으로 재단되던 시절이 있었다. '불법 음반'이란 딱지가 여기저기 붙는 가운데 어렵게 녹음한 음악들이 지하방 카세트 테이프로 돌아다니던 1970, 1980년대. 노래가 사회적 산물이고 사회적 발언이 되던 그 시기, 음악은 정치가 틀어쥐던 기성 권력에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음악은 '자본 권력' 아래 자유롭지 못하다. 시장 논리로 움직이는 이 시스템 안에서는 철저히 상품성을 기준으로 음악이 생산되고 유통된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이 음악 상품들은 시청률과 음원차트라는 매대에 진열돼 '하루살이' 경쟁을 한다. 긴 호흡으로 정성스레 음악하는 뮤지션들이 소멸하는 이 시대, 좀 더 고른 음악 세계를 위한 탈출구는 없을까.
지난 2004년 '한국대중음악상(KMA·한대음)'은 이러한 국내 대중 음악계의 구조적 모순을 바로 잡고자 출범했다. 음악평론가와 교수, 기자, PD 등 전문가들이 뭉쳐 만든 이 시상식은 장르로 획일화된 오늘날 음악계 현실을 극복하고자 다양한 '음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타 시상식과 달리 철저하게 음악성을 평가 기준으로 삼기에 '한국판 그래미어워즈'라고도 불린다. 밴드나 힙합, 포크 등의 장르별 뮤지션들이 수상의 영예를 거머쥐고, 주류·비주류의 경계를 넘어 가요계 선후배가 화합하는 국내 유일무이한 음악인들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이 시상식이 탄생한 시점부터 선정위원장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70, 80년대 음악의 '생산과 규율의 권력'이 정치였다면 그것이 90년대 후반부터 자본으로 변화해왔다"며 "음악 시장의 불균형이 확대된 지금의 상황을 바로잡는 데 '한대음'이 미약하나마 기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얘기한다. 국내 음악계의 '종 다양성'을 위해 16년 간 이 상을 이끈 그를 지난달 27일 성공회대 교수연구실에서 만나봤다.
김창남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 사진/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
유신 시절 노래패 활동, 음악과 사회 관심으로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탁자 가운데 놓인 어쿠스틱 기타였다. "다른 교수 두 명과 더숲트리오라는 이름으로 가끔 학생들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한다"며 웃는 그에게서 음악을 사랑하는 영락 없는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을 듣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당시 집에 오래된 전축이 하나 있었는데, 그때 딸려온 LP 몇장을 외우다시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희준, 이미자 같은 60년대 가수들 노래였는데 그 어린 나이에 완전 꽂혀버렸던 거죠."
10대가 된 1970년대부터는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같은 가수들을 들었고, 어머니가 사주신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유신시절 말기 78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는 대학 노래패 활동을 거쳐 한국 민중가요사에 획을 그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창립 멤버가 된다.
"어쩌면 대학 노래패에 가입하는 순간 제 인생 방향이 어느 정도 결정된 셈이었죠. 당시는 유신 말기였는데, 대학 스터디나 노래패 활동을 통해 의식화 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밟게 됐어요. 음악과 사회 변화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물음은 그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요."
1978년 겨울 김 위원장은 가수 김민기를 처음 만났다. 그와 함께 노동문제를 다룬 곡 '공장의 불빛'을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했다. 권력 입맛에 맞는 음악만 유통되던 당시, 그러한 제작 방식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때부터 특정 권력에 의해 생산·유통되는 대중음악이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음을 체감하며, 문제의식을 계속해 확장시켰다.
김창남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 사진/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
'한대음'의 탄생 배경 "시장 논리 보다는 음악성"
음악을 재단하던 권력은 90년대 이후 정치에서 자본으로 넘어갔다. 상업성을 앞세운 시장 논리는 특정 장르에 치우친 음악 위주로 생산, 유통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0대들을 타깃에 둔 댄스와 팝이 범람했고, 대형 기획사들은 '아이돌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부터는 기술 발달로 디지털화 되면서 음원 복제 문제가 시작됐다. 제작 방식은 음반보다 음원 형태로 빠르게 바뀌었고, 감상 문화도 몰입보단 소비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긴 호흡으로 음악을 만들던 뮤지션들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없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음악 감상이 '즐기는 문화'에서 점점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누가 더 빠른 시간 안에 대중들 귀를 사로 잡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졌고 지금도 그렇죠. 이런 것들을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04년 김 위원장이 15명의 전문가(선정위원)와 함께 한대음을 출범시킨 계기였다. 16년 동안 이어져 온 이 시상식은 상업성으로 평가하는 여타 시상식과 달리 음악성을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아왔다.
역대 수상자로는 러브홀릭과 더더, 빅마마, 조PD, 윤도현, 이한철, 이적, 장기하와 얼굴들, 언니네이발관, 서울전자음악단, 소녀시대, 싸이, 조용필, 빅뱅, 박재범, 선우정아, 혁오, 방탄소년단 등이 있다. 수상자 면면을 보면 아이돌부터 밴드나 힙합, 포크 뮤지션에 이르기까지 장르적 편중이 없는 편이다.
"음악적 '종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기회를 찾고자 시작했습니다. 일각에선 한국의 그래미상을 지향한다는 표현도 있는데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미 만큼 권위가 있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2월 '2019 한대음'에서 '국내 포크 음악계의 대모' 양희은이 후배 가수 김사월에게 트로피를 전달하는 모습. 사진/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
'코리아 그래미'로 불리기까지, '한대음' 16년
15명이 시작한 '선정위원'은 점점 규모가 늘어나 올해로 70명 수준에 이르렀다. 선정위원단에는 음악평론가과 교수, 기자, PD, 그리고 음악 웹진 운영자, 시민단체 관련자들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시즌이 되면 한 해 동안 발표된 음악들을 두고 후보 추천을 받고 투표를 거쳐 수상자를 결정한다.
"시상식을 만들어가는 역할은 이 선정위원회가 합니다. 위원들은 각자 자기 영역에서 활동하는 음악 마니아들이고, 저마다의 음악적 관점을 갖고 있어요. 때문에 선정과정에서 늘 논쟁과 토론이 많은데, 저는 이 위원회의 작업을 진행시키고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어요."
'코리아 그래미'로 불리기까지 지난 16년간 무수한 일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간다. 첫 해 수상자 데프콘은 트로피를 들며 "가수 생활이 잘 안되면 시골로 내려가려 했다. 이 상에 용기를 얻었다"고 했고, 이후 스타가 됐다. "그동안 많은 상을 받았지만 이 상이 특히 의미가 크다"는 가수 엄정화나 "그동안의 음악생활에 대해 누군가가 수고했다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다"는 이승렬의 소감도 그에겐 인상 깊다.
올해도 '한대음'은 가요계 선후배, 주류와 비주류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음악 생태계를 재정의했다. '국내 포크 음악계의 대모' 양희은이 공로상 수상자로 무대에 올랐고, 방탄소년단(BTS) 전원이 무대에 올라 "음악에는 고하가 없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콜트콜텍기타노동자밴드 '콜텍'은 무대에서 부당해고의 문제를 꺼내 들었고, 세월호 참사와 한국사회를 돌아보는 재즈 음반이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음악성에 대한 평가, 음악과 사회의 유기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이 시상식만의 흐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시상식에서 기본 소득 문제를 언급하거나 젠트리피케이션에 반대하는 가수들도 있었어요.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 지원금이 갑자기 끊긴 적도 있는데, 뮤지션들이 적극 참여해 단결된 목소리를 내주던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은 사회적 산물이고, 노래는 사회적 발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창남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이 지난 2월 열린 '2019 한대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그는 이 자리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좋은 음악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믿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음악이 필요하다. 부디 이 시상식이 뮤지션들의 어깨를 두드려 줄 수 있는 상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
"마이너리그 활성화…'음악 풍요'로 가는 지름길"
김 위원장은 미래에는 세대적으로나 장르적으로나 '다양한 음악이 숨쉴 수 있는 환경'을 바란다. 음원차트나 시청률 경쟁에 매몰되기보다 음악성을 갖춘 음악이 제대로 평가 받는 세상을 희망한다. 긴 호흡의 앨범 한 장을 만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존중 받는 사회가 오기를 꿈꾼다.
그는 다양한 마이너리그들이 활성화돼야 우리 사회가 '음악적 풍요'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김 위원장은 "마이너리그라는 표현을 지적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늘 유럽 축구 리그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며 "마이너리그에서 열심히 뛰는 선수들이 충분히 먹고 살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처럼, 국내 소수 장르의 뮤지션들도 재생산이 가능한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를 위해 공적인 시스템과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한대음'도 그러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을 두고 또 하나의 권력 아니냐는 식의 비판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우리가 작은 권력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후보에 오르면 음악도 많이 팔리고 음원차트에도 오르고, 그 정도의 영향력이라도 가졌으면 해요. 앞으로 '한대음'이 시장의 불균형을 미약하게나마 해소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