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재밌게 봤던 농구만화 '슬램덩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화려한 도미보다 진흙투성이 가자미가 돼라." 경기 내용을 주도하고 이끄는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팀원을 믿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해 결국 승리에 공헌하라는 뜻이다.
최근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서 우리 정부의 '운전자·중재자·촉진자' 역할이 약화된 것 아니냐는 우려들이 나오고 있다. 한반도 문제 해결구도가 기존의 남북미 3각 구도에서 남북미중 4각 구도로 바뀌면서 중국이 중재자 역할을 대신하고 우리의 존재감은 사라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6월 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북한이 묵묵부답인 것도 우리의 영향력 감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현재 진행 중인 비핵화 협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비핵화 달성과 평화체제 구축'이다. 그리고 비핵화 협상의 최종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다. 우리 정부나 중국 정부가 얼마나 주도적으로 협상을 이끌어 가는지가 관건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우리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2년 전을 생각해보자. 당시 남북관계는 얼어 있었고, 북한은 국제무대에서 고립돼 있었다. '운전자'로 한반도문제를 끌고 가야했다. 그 후 1차 싱가포르 북미협상이 성사되기까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북한과 미국 사이의 '중재자'로 양국관계를 조율해야 했다. 또 2차 하노이 북미협상의 결렬로 꺼져가는 비핵화 협상 불씨를 '촉진자'로 살려야 했다.
이제 다시 비핵화 협상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모양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협상에 나섰다. 이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수레바퀴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협상이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적극 도우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 뒤 '노벨평화상을 받으라'는 고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덕담에 "노벨상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핵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가 조성된다면 화려한 도미가 되던 진흙투성이 가자미가 되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성휘 기자 noirciel@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