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세상에 대단한 사람들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짧게는 10년에서 많으면 수십년간 같은 일을 하면서 어떤 일을 하는데 "도가 텄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기까지 반복해 온 그 시간에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일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도 신체에 무리를 주게 되고, 신체적인 요소를 떠나 정신적으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쉽지 않다. 심지어 너무나 재미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게임을 하면서도 같은 퀘스트가 반복되면 질려 하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 게 많다. 최근엔 휴대폰이 내 얼굴을 알아보니 나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휴대폰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패턴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있고, 수많은 웹사이트의 비밀번호는 왜 이렇게 기억이 안나는지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SMS 인증을 반복해야 하기도 한다. 2015년부터 비대면 계좌개설이 시작된 이래로 은행이나 증권사에 가지 않고도 계좌를 만들수 있게 되었지만, 계좌를 개설할 때마다 신분증 촬영부터 몇 가지를 반복해야 한다. 우리가 신분증 촬영과 인증번호 입력의 달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비대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자기주권형 디지털신분증 개념이 대두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다. 원래 디지털 정보는 조작이 가능하고, 위변조를 해도 원본과 사본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디지털 상태로 제시된 신분증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개념의 디지털신분증은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특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요건을 갖춘 신원인증 발급기관이 먼저 일정한 단계를 거쳐 인증을 하고 나면, 인증 내용을 개인에게 보내준다. 이때 정보를 암호화하면서 퍼블릭 키를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올려두고, 나중에 해당 인증내용을 확인하는 쪽은 고객이 제출한 정보가 위변조 된 적이 없는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물어보는 방식으로 위변조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등장하기 전에도 존재했던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위변조 여부를 확인해주는 시스템이 누구의 소유라면 신뢰를 확보하기도 어렵고(소유자의 조작위험), 다른 기업들도 그 운영사에 종속될 것을 우려해 참여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거버넌스가 분산된 퍼블릭 블록체인, 또는 관계된 회사들이 거버넌스를 나눠가질 수 있는 컨소시엄 블록체인이 등장하고 나서야 실제 적용이 가능해 진 것이다.
지난 6월26일 금융위원회가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해 규제 샌드박스로 추진하게 한 '디지털신원인증 플랫폼'은 이러한 기술이 실제 세상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아이콘루프가 주도하게 될 이 프로젝트는 이미 국내 은행과 증권, 보험사, E-커머스 회사를 아우르는 18개의 참여사가 참여 의향을 밝혀왔고, 지금도 추가 참가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기존에도 유사한 디지털 신분증 개념은 존재했지만, 비대면 계좌개설과 같은 금융서비스까지 활용가능한 경우는 국내에선 이번이 최초이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신뢰를 요구하는 금융서비스에 활용 가능하다면, 일반적인 인터넷 서비스에도 당연히 활용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용자가 매번 인증하지 않아도 한번 인증된 정보를 가지고 편하게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한국의 온라인 금융 서비스는 일부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속도와 처리 가능 업무 범위에서는 독보적이다.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하는 후배가 싱가포르에서는 인터넷뱅킹으로도 당일 이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아시아 최고의 금융 허브를 자부하는 국가에서도 한국의 속도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규제를 풀어 혁신을 가속화 한 정책당국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최근 페이스북이 리브라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 블록체인 기반의 ID 서비스를 발판으로 다양한 생태계를 확장시키겠다고 발표한 것을 감안할 때, 이번 '마이아이디' 서비스의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은 글로벌 트렌드의 속도에 뒤지지 않고 발빠르게 혁신금융서비스를 촉진할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범금융권이 참여하는 이번 프로젝트가 한국의 금융 서비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용준 아이콘루프 사업개발담당이사(yj@icon.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