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묵적지수’는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의 시즌 프로그램 3번째 작품입니다. 묵적지수는 ‘진짜 전쟁을 막기 위한 가짜 전쟁’을 다룬 작품인데요.
2500년전 춘추전국시대. 전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사상가 ‘묵적’은 혈혈단신 초나라로 향합니다. 최신식 병기인 운제를 시험하기 위해 송나라를 침략하려는 초나라 혜왕을 만나 전쟁을 막기 위함인데요.
묵적은 혜왕을 설득하려 하지만, 혜왕은 어떤 말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궁리 끝에 묵적은 전쟁 여부를 건 모의전을 제안하는데요. 다만, 실제 전쟁과 같되 한 사람도 목숨을 잃어 선 안된다고 규칙 하나를 제언합니다.
묵적의 제안을 받아들인 혜왕은 초나라 사람들에게 초인과 송인으로 나뉘어져 역할을 수행할 것을 명하고, 모의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래은 연출은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승자독식 체제로 편성된 인간 사회의 모순’을 짚고자 작품을 연출했다고 설명했는데요.
연극 '묵적지수'의 전막공연 전경. 사진/서울문화재단
(인터뷰 : 이래은 연출)
“싸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야망에 의해서 서로 칼을 겨누고, 전쟁을 치른다. 가장 큰 비극이다. 특히 병사들 캐스팅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병사들이 작은 역으로 소비되지 않고, 주요 역을 맡은 배우들이 병사 역을 맡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에 뛰는 장면을 설명하자면, 그저 위에 있는 권력자들에 순응해서 동료들에게 칼을 겨누던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서 묵가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묵가를 알리고, 함께 묵가가 되는 그런 의미에서 운동성을 표현하고 있어 뛰는 장면을 넣었다.”
전쟁의 서사에서 영웅이 아닌 일반인이나, 사회적 약자도 주체적으로 변화와 혁명을 주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묵가의 사상과도 맞닿는 점이죠. 이 작품은 고정된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Gender Free Casting)’, ‘360도 공연 무대’, ‘휠체어 리프트 이용이 필요 없는 객석 출입구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펼칩니다.
연극 '묵적지수'의 전막공연 단체 장면. 사진/서울문화재단
(인터뷰 : 이래은 연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대부분의 캐스팅이 남성이었다. 그래서 남성이 많이 나오는 전쟁 이야기가 2019년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2019년 공격으로부터 전쟁을 막아내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고민했다. 작년에 연극계에서 가장 큰 이슈인 미투가 떠올랐고, 미투 이후 성폭력과 싸우는 여성 배우들이 생각났다. 여성들이 협소한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출가로써 창작자로써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젠더 프리 캐스팅’을 하게 됐다.”
묵적지수는 변산희곡상을 수상했는데요. “섣불리 현대와 타협하지 않고, 고문헌들에 대한 방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 시대의 역사성과 사상을 재현한 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희곡을 쓴 서민준 작가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극작을 전공 중입니다. 지난 2015년 신작희곡 페스티벌을 통해 등단했고, 지난해 ‘종이인간’을 공연하면서 연극계에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연극 '묵적지수'의 전막공연 중 성수연(장질 역), 하지은(묵적 역) 출연 장면. 사진/서울문화재단
(인터뷰 : 서민준 작가)
“전쟁을 겪어본 세대가 아니고, 전쟁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모른다. 가끔 전쟁을 엔터테인먼트로 생각하는 경우를 보면서 경악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제가 쓴 작품도 그런 식으로 소비될 수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묵적지수에는 배우 경지은, 민대식, 박훈규, 성수연 등이 함께 하는데요. 특히 성수연 배우는 지난 55회 백상예술대상에서 18년만에 부활한 젊은 연극상을 수상하면서 실력파 배우로 주목받았습니다.
한편, 애초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7일까지 공연 예정이었으나, 초혜왕 역의 경지은 배우가 프레스 리허설 전막 공연 중 부상을 당하면서 공연 일정이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김영택 기자 ykim98@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