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국뽕’에 취하고 싶은 밤

입력 : 2019-07-10 오전 6:00:00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온나라가 혼란에 빠져있다. 피해자가 된 반도체 기업들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고, 정부는 부랴부랴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느라 고심 중이다. 또 증권가에서는 이로 인한 파장이 어느 분야, 어느 기업 주가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그러게 여태 국내 기업들 안 키우고 뭐했냐는 힐난도 나온다. 그렇게 중요한 소재라면 여러 나라, 여러 기업으로 분산했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이 마당엔 아무 소용 없다. 이번에 문제가 된 주요 소재 중 몇 가지는 국내 중소기업들도 만들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입장에선 더 품질 좋고 더 경쟁력 있는 제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거래처를 골라 계약을 맺었을 것이고, 그게 하필 일본 기업이었을 테니 이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나마 국내에서 조달이 가능하다는 소재도 삼성전자 등에 제대로 납품하려면 설비부터 늘려야 하는데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지금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은 아닐 것이다. 우리도 기술력 있다고 큰소리치는 건 그야말로 ‘정신승리’ 혹은 ‘국뽕’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한국 기업이 물건을 제대로 만들지 못할 상황인데 이 반도체를 써야 하는 글로벌 시장은 안녕하실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자인 마이크론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세상은 실핏줄 같은 네트워크로 촘촘히 연결돼 있고 반도체는 그 연결을 지탱하는 핏줄임은 물론 몸뚱이 전체를 구성한 세포나 다름없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면 다 같이 흔들리는 것이다. 국제사회와 공조해 함께 대응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 와중에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들에게 눈총을 주는 이들이 있다. 소녀상에 침을 뱉었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대법원이 징용 당사자인 일본 기업에게 보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린 후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할아버지가 이번 일본 정부의 보복 결정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다”며 슬퍼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한때 화제의 중심에 섰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한 대목이 떠올랐다. 달리는 열차를 피할 수 없는 철로 위의 다수의 무리를 살리기 위해 소수가 있는 쪽으로 선로를 바꿔 그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다른 사람이 선택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지, 굳이 말이나 행동할 필요가 없다면 그냥 침묵해 소수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지. 나라면 어땠을까 한참 생각했지만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다만 머리를 쥐어짠 끝에 얻은 결론은, 감히 누구도 다른 이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법원의 판결은 그분들이 오래 전에 가졌어야 할, 권력자에 의해 빼앗긴, 마땅한 권리다. 여태 ‘국가를 위해’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도 모자라 지금도 폭력을 일삼고 있다.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충분히 그러고 있다. 
 
이때다 싶어 안으로 화살을 돌리는 정치권과 일부 언론을 지켜보자니 구한말 배경의 TV 드라마가 생각난다. 정치인들과 언론매체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스탠스’를 취한 것일 게다. 선거에 나선 아베 총리처럼. 드라마 애청자가 보기엔, 지금의 정치인, 언론들 또한 그 드라마 속의 어떤 배역들과 아주 닮아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차라리 시원하게 일갈하고 끝낼 수 있는 드라마였으면 좋겠다. ‘국뽕’에 취하고 싶은 요즘이다. 
 
 
김창경 증권부장·재테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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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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