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한 양국 과장급 실무회의가 열렸다. 일본 경제산업성 별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양국 참석자들은 악수조차 하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회의 참가자들의 이름표도 없었고, 차 한 잔도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한국을 의도적으로 홀대하겠다는 속마음이 훤하게 드러난 것이다. 제우스 신이 일본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손님을 우대할 줄 모른다며 혼냈을 것이다.
이날 한국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강력 항의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이제 일본의 경제보복 대상은 애초의 반도체 디스플레이용 부품 3가지를 넘어 모든 산업으로 번질 조짐이다.
아베 정권의 이번 초강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수법과 빼닮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을 상대로 통상보복의 화살을 날려 왔다. 특히 중국을 집중공격해왔다. 세계 유일 패권을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날린 화살을 아베 정권이 재활용하는 것이다. 자유무역으로 성장한 일본이 흉내내지 말아야 할 것을 흉내내는 셈이다.
일본은 특히 한국에 저지른 과거의 죄업에 대한 최소한의 부채의식마저 던져버린 것 같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일본에 비해 3분의1에 불과하지만 더 커지기 전에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일제 강점기 징용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언제까지 그 죄의식에 끌려다녀야 하는가"라는 심리에 불을 당겼을 듯하다.
어쨌든 한국으로서는 당장 일본의 경제보복 대상에 오른 품목을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것이 시급해졌다. 당장 보복대상에 오른 품목 3가지는 대상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스스로의 힘과 수단으로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보복이 확대될 경우다. 하나금융투자에 따르면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제품 가운데 소비재는 1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중간재 또는 자본재이다. 이들 중간재와 자본재의 공급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품목에 대한 대책이 시급해졌다.
이번 보복사태를 계기로 반도체 산업의 골칫거리 하나가 해소된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안고 있던 반도체 재고를 덜어낼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하락을 거듭하만 하던 반도체 가격이 오름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런 반작용을 너무 좋아해서는 안된다. 비록 가격이 다소 올라 일부 반도체 대기업의 실적과 주가가 회복된다고 해도 전반적인 경제상태가 악화된다면 큰 의미가 없다.
한국의 경제는 여전히 저성장과 고용부진의 늪에 갇혀 있다. 일본의 보복이 더해지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걱정된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올해 경제성장률이 2%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은 이미 나왔다. 그렇지만 단순히 성장률 하락이 다는 아니다. 더 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사태를 조기에 해결하기 위한 외교노력이 적극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이를테면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제안한 특사파견도 괜찮은 방법이라 여겨진다.
이번 보복사태로 한국과 일본의 경제협력 관계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이 생겼다. 어떻게 끝나든 감정의 앙금은 오래도록 남을 듯하다. 따라서 앞으로 일본의 부품소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 정부는 앞으로 소재부품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올해 추가경정예산안에 소재부품 국산화 지원을 위해 최소한 1200억원 이상의 예산을 추가하기로 했다. 또 앞으로 5~6년동안 해마다 6조원가량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이제서야 정부와 업계가 안이한 정신상태에서 벗어날 모양이다.
이번 경제보복을 감행한 일본의 아베 정권은 순탄할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번 경제보복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내부에서 역풍을 맞아 밀려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일본여행 취소로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반발이 커지면 그렇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다. 한국이 그런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서도 안된다. 스스로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와 업계, 그리고 정치권이 힘과 지혜를 모아 침착하고 정확하게 대응해야 한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