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세상과의 전원이 잠시 끊긴 완벽한 밤이었다. 그들은 '지직' 거리는 TV를 켰고, 곧 다른 차원의 세상을 열었다. 초현실적 '경이'에 이르는 새로운 세계. 흡사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시간'을 보는 듯한 경험. 지난 8일 미국 밴드 레이니(LANY)의 네 번째 내한 공연을 본 소감이다.
평일 답지 않은 평일이었다. 이날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 일대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얼굴에 형광 티셔츠를 들이미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티셔츠 안 구부러진 글꼴 'LANY'는 흐물거리며 뭉개지는 달리의 시계 같았다. 무의식 내지는 꿈에서나 볼 법한 환상의 형상들. 하지만 더 넓고 초현실적인 판타지의 세계는 홀 안 쪽에 따로 있었다.
밴드는 등장 전 '지직' 거리는 TV의 노이즈 효과를 1분간 켰다. 꽤 긴 이 침묵의 시간은 세상과의 완연한 결별을 선언하는 듯 했다. 째각 거리는 카운트다운에 맞춰 그들이 그려내는 세계로 빨려들어갔다.
미국 밴드 레이니.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서울이었던 그곳은 이내 흥겨운 뉴욕이었다가, 따사로운 로스앤젤레스였다가, 다시 반짝이는 말리부의 해안가가 됐다. 경쾌한 리듬과 비트는 특정 시공의 경계를 허물고는 상실과 사랑의 뫼비우스를 부지런히 순환했다. 첫 곡은 80년대 신스팝 색채가 강한 '씽크 앤 씬(Think And Thin)'.틀어져 버린 관계를 경쾌한 리듬과 비트에 섞어내는 아이러니로 그들은 인사를 대신했다. "와썹 서울!"
지난 2014년 결성된 밴드는 전직 모델 출신의 프런트맨 폴 클라인과 키보디스트 레스 프리스트, 드러머 제이크 고스에 의해 결성됐다. 밴드명 LANY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와 뉴욕(New York)의 머리 글자를 따서 지은 단어. "미 전역을 사로 잡는 음악"을 하겠다는 말과 동의어다.
주로 사랑과 상실에 관한 멜랑콜리한 가사를 쓰지만, 사운드에만 집중하면 이들의 노랫말은 새하얗게 지워지고 만다. 초현실적 아이러니. 심지어 심각하고 진진한 이별 상황조차 이들의 드럼과 신스, 기타는 말리부의 투명한 파도같이 부서지며 질주한다.
미국 밴드 레이니.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그 시간 홀의 모든 것들 역시 초현실적 아이러니였다. 라이브로 부각되는 아이러니의 파동은 음원으로 들을 때보다 더 강렬했다. 폴은 총 세번이나 무대 아래를 난입했는데, 관객들의 손을 맞잡고는 '청량하고 경쾌한 이별의 노래'를 불렀다.
연주자들은 모두 노랫말의 결과는 달리, 정반대의 사운드를 연주했다. 고스는 성냥개비 같은 걸 물고 드럼 비트를 맹렬히 난사해댔고, 프리스트는 루프스테이션을 매만지며 기타와 건반의 경쾌한 음들을 계속해서 층층히 쌓아올렸다.
이단 분리로 구성된 LED 무대에선 형형색색의 형광 조명이 사방으로 물결쳤다. 그 물결은 공연 초반 해변 같았다가, 공연 말미 핑크색 구름이 됐고, 관객들이 치켜든 핸드폰 불빛과 함께 거대 은하수를 이뤘다.
2017년부터 밴드는 해마다 한국을 찾아오고 있다. 그 해 '지산 밸리 록 뮤직 앤 아츠 페스티벌' 차 내한했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첫 내한 단독 공연을 열었다. 이듬해 4월 또 다시 한국을 찾아 열정적인 라이브와 무대 매너를 보여줬다.
이번 내한은 지난해 10월 낸 2집 '말리부 나이츠(Malibu Nights)'를 기념하기 위한 월드투어 일환으로, 이 앨범의 라이브 비중이 특히 컸다. '렛 미 노우(Let Me Know)'와 '발렌타인스 데이(Valentine's Day)'를 제외하고는 앨범에 수록된 7곡을 모두 불렀다. 앙코르도 대표곡 'ILYSB'와 함께 이 앨범 수록곡 '쓰루 디스 티얼스(Thru These Tears)'를 배치시켰다.
'감사합니다'
2시간여의 공연 후 어색한 한국어가 암전된 무대 틈으로 흘렀다. 형광색의 사람들이 해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름 휴가 같은 초현실적 평일이 거기 있었다.
미국 밴드 레이니.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