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찰리 파커는 수면 위에 던져진 큰 바위였죠. 재즈는 파커 전과 후로 나뉜다고요."
5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CJ아지트 광흥창 내 한 스튜디오. 빨간 안경을 쓴 이가 재즈사를 거스르며 열띤 '강연'을 이어갔다. 찰리 파커(1920~1995) 업적에 대한 은유적 헌사. 비밥이 왜 위대한가에 관한 일장 연설.
"파커는 색소폰 연주자였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재즈계의 화성과 리듬을 완전히 재정의한 인물이었죠. 최고의 연주를 하려면 그를 우선 알아야 해요."
그의 말대로 파커는 재즈사의 성경과 같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춤추기 좋은 스윙과 빅밴드의 시대는 파커 이후 막을 내렸다. 그는 자유분방한 색소폰 연주로 새 시대를 선언했다. 194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비밥'의 유행. 코드 체인지와 즉흥연주는 빠르고 난해했지만 시대의 변화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날카로운 사운드가 당대 주류 재즈 문화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켰다.
5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CJ아지트 광흥창 내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케빈 해리스. 사진/CJ문화재단
파커의 열혈 '신도'인 그는 버클리 음대 교수 케빈 해리스다. 재즈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파커를 피아노적 관점으로 탐구하며 재해석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2015년 낸 5번째 앨범 'Bird Interpretations'. 과거, 현재를 막론하고 '버드'란 별명의 파커가 끼쳐온 영향을 피아노 음으로 연구했다. 가장 최근 발표한 곡도 파커의 유명한 비밥 'Donna Lee'의 파격적인 피아노 버전. 통상 오른 손이 멜로디 연주를 담당하는 재즈계의 관례를 깨는 데서부터 출발한 곡이다.
"두 손을 갖고 대화하 듯 연주하는 곡이죠. 파커의 곡들에 '피아노 혁명(Piano revolution)'을 가했죠. 파커가 간 길을 따르다 보면 저도 큰 바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파커 애호가지만 그의 음악적 뿌리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스윙과 쿨재즈, 바흐 같은 클래식, 아프로칸 민속 리듬이 섞인 카리브해 음악 등 다양하다. 미국 켄터키 렉싱턴에서 나고 자란 그의 궁극적 뿌리는 블랙 가스펠 뮤직. "파커든, 블루스든, 모든 재즈적 뿌리는 결국 블랙 가스펠이에요. 이 남부지역의 사람들이 뉴욕, 시카고로 건너가서 재즈를 발전시켰죠. 노예제 이후의 두려움을 음악적 용기로 극복하면서요. 재즈가 영적이고, 사회적이며, 특별한 이유죠."
케빈 해리스 피아니스트 겸 버클리 음대 교수. 사진/CJ문화재단
해리스는 재즈사가 사회 변화와 줄곧 함께 해왔다고 말했다. 그가 직접 쓴 오리지널 곡들 역시 오늘의 현실을 담은 내용들이다. 인종 차별, 총기 사고 등 현 시대 미국과 세계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는 2020년 파나마 재즈페스티벌에선 미국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에게 영감 받은 곡들을 선보인다.
"볼드윈은 일찍이 인종 차별 문제를 작품으로 환기시켰어요. 그는 흑인들의 노예제를 비판하며 모든 개개인은 고유의 권한을 갖고 있다 했죠. 인종 차별 뿐이 아니예요.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 이 시대의 온갖 혐오와 아픔이 많죠. 저는 이를 대변하는 건 아티스트의 의무라 생각해요. 스티비 원더를 보세요. 그 노래만 듣고도 우리는 시대상을 알 수 있잖아요. 재즈도 그래요."
아이돌, 힙합 등 특정 음악의 독식인 한국 음악 환경에서 '재즈 대중화'는 요원하기만 한 일이다. 재즈의 고향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답을 구하려다 되려 말로 뒤통수를 맞았다. "왜 꼭 재즈가 대중화 돼야 하나요? 저는 늘 제가 마이너리티라고 생각했는 걸요."
그는 "다빈치나 스트라빈스카 같은 아티스트들도 당대에는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며 "현 시대의 재즈 역시 유명해지려고 하기 보단 정직하게 소통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지금 유명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유명해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고 소신을 얘기했다.
지난 5일 CJ아지트 광흥창에서 공연을 연 케빈 해리스. 사진/CJ문화재단
또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재즈 베이시스트 황호규를 비롯해 재즈 드러머 김종국, 색소포니스트 남유선, 베이스플레이어 황슬기 등의 이름을 거명하며 "미국의 유명 재즈클럽에서 한국의 재능있는 재즈 뮤지션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이날 밤 8시 CJ아지트에선 자신의 이름을 건 공연 '케빈 해리스 프로젝트'가 열렸다. 버클리음대 장학생을 지원하는 CJ문화재단 주최의 행사다. 황호규와 미국 출신의 세계적 재즈 드러머 리 피쉬가 그와 트리오를 꾸렸다. 한국 공연은 2017년과 지난해에 이어 이번이 세번 째.
"저번엔 공연 후 팬분들이 '같이 밥 먹지 않겠냐' 하시더라고요. 제가 서울을 더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건 이런 따뜻한 분들 덕분이에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